영화 ‘아이 캔 스피크’, 민원 왕 ‘도깨비 할매’가 영어를 배운 이유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민원 왕 ‘도깨비 할매’가 영어를 배운 이유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9.22 13:51
  • 호수 5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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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옥분’의 이야기를 담은 이번 작품은 기존 영화들과 달리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온 위안부 피해자들을 그려내며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사진은 극중 옥분이 영어 공부를 하는 모습.

수천 건 민원제기한 ‘옥분’이 구청직원에게 영어 배우는 과정 담아
기존 위안부 소재 작품과 달리 일상적인 시선으로 피해자 아픔 조명

미국 하원에서 진행된 한 청문회. ‘옥분’이란 이름을 가진 한 할머니가 증인석에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의복을 떠올리게는 하얀 한복을 곱게 입고 등장한 그의 입에 청문회장을 채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증언을 시작하겠냐는 질문에 옥분은 잠시 주저한다. 하지만 곧 정적을 깬 그의 한마디는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든다.
“아이 캔 스피크.”
위안부 문제를 기존과 다른 관점에 다룬 ‘아이 캔 스피크’가 9월 21일 개봉했다. 기존 위안부 작품들이 일제에 당한 처참한 피해를 묘사하는데 중점을 뒀다면 이 영화는 옥분을 통해 지극히 일상적인 시선으로 피해자를 조명한다.

옥분(나문희 분)은 매일같이 구청 민원 창구에 발도장을 찍는다. 꺼진 방범등 수리부터 동네 주변을 수상하게 맴도는 사내에 대해 조사 의뢰뿐만 아니라 편법을 써 재개발을 하려는 기업의 악행도 고발한다.
접수한 민원만 8000건에 달해 구청 직원들 사이에서 옥분은 ‘블랙리스트 1호’로 자리잡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구청을 찾는 그를 공무원들은 ‘도깨비 할매’라고 부른다. 구청에 새로 부임한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도 옥분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기존 공무원과 달리 원칙과 절차만이 답이라고 믿는 민재는 흔들림 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를 대하면서 구청 내 유일한 옥분의 대항마가 된다.
수많은 민원 제기로 응어리를 털어낸 옥분에게 단 하나 해결하지 못한 민원이 ‘영어 회화’다.늦게 배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친구 정심(손숙 분)을 부러워했던 옥분은 어느 날 민재가 수준급의 영어 실력을 구사하는 것을 보게 되고 과외를 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한다.

민재는 ‘경도’ ‘위도’ ‘생태학’ 등 쓸 일이 없어 보이는 영어단어를 암기해오라는 조건을 내세워 옥분을 떨쳐내려 한다. 그러다 옥분이 종종 민재 남동생의 저녁 끼니를 살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옥분의 제안을 결국 수락한다.
할머니의 코믹한 영어 도전기로 보일 수 있는 작품은 이때부터 진짜 이야기를 펼쳐낸다. 금방 지칠 거라는 민재의 예상과 달리 옥분은 열정적으로 영어를 배운다. 민재는 곧 옥분이 그토록 영어에 집착한 이유를 알게 된다. 옥분이 왜 그렇게 오지랖 넓게 살아왔는지, 왜 시장 바닥을 누비면서 사사건건 참견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풀린다.

이미 알려졌듯 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다. 영어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만드는 정심 역시 함께 만주로 끌려갔던 친구다. 자유의 몸이 된 뒤에도 두 사람은 우정을 이어오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정심이 세상 밖으로 나와 감춰진 역사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발언했다면 옥분은 이웃들도 모르게 숨겨왔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옥분은 자신과 정심을 위해, 또한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들을 위해 기꺼이 치부를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미국에서 열린 ‘위안부 사회결의안 채택을 위한 청문회’에 참석해 자신의 경험을 밝히기로 다짐한 것이다. 통역이나 설명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기 위해 영어 연설을 준비한 것이다.

이번 작품의 주목할 점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역사 증언자나 일본을 악행을 꾸짖는 상징이 아닌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수만명에서 최대 수십만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 가운데 피해자임을 밝힌 이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볼 때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이다.
또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소재에 적절히 코믹함을 더해 극 후반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옥분의 청문회 증언 장면은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데, 실제로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옥분이 자신의 몸, 자신의 언어로 아픈 역사를 발언하는 장면에선 앞서 소개된 그녀의 삶이 겹쳐지면서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꿈이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해 이 무대에 섰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 어떤 발언보다도 강렬하다.

청문회장에서 옥분과 네덜란드 출신 군 위안부 피해자가 손을 맞잡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국적을 초월한 두 여성 피해자가 서로의 경험을 경청하고 위로하면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성한다.
코믹하면서도 진중한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연기는 나문희였기에 가능했다. 친근한 이미지로 웃음을 주는 것은 물론, 대사 없이 촉촉한 눈망울만으로도 감동을 선사한다. 이제훈도 자로 잰 듯한 공무원 민재를 생생하게 연기하면서 극의 양념 역할을 확실히 해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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