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궁궐
밤의 궁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9.29 10:44
  • 호수 5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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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궁궐은 특별히 매혹적이며 환상적이다. 일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에 나갔다.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곳에선 주말마다 무대가 선다는 걸 알고 있어서다. 이날도 어김없이 야외무대 좌우와 전방에 설치된 대형스피커에서 강강술래 노래가 귀청을 때렸다. 종로구가 주최한 종로 한복축제였다. 젊은이서부터 노인까지 수백 명이 컬러풀한 한복을 입고 환한 표정으로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그리며 쉼 없이 돌고 있었다.
한복축제 행사가 끝나는 걸 보고 기자는 발걸음을 무심하게 경복궁 쪽으로 옮겼다. 광화문 안쪽에서도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곧게 뻗은 조명 줄기가 밤하늘을 갈랐다. 원래는 궁 안으로 들어갈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한 젊은 부부의 선행으로 밤의 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야간 입장은 인터넷 예매로만 가능한데 첨보는 젊은 부부가 기자에게 다가와 “다른 볼일이 생겼다”며 자기들이 예매한 입장권을 거저 주었던 것이다.

불빛을 환하게 밝힌 근정전은 낮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박석 위를 걷거나 근정전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선 선글라스가 필요 없다는 말이 있다. 화강암을 얇게 켜 깔아놓은 박석이 햇빛을 난반사시켜 눈을 부시지 않게 해서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경복궁은 비 오는 날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근정전 앞 대신들이 도열했던 너른 뜰을 배수를 위해 1m 경사지게 만들어 빗물이 잘 빠지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자는 비가 오던 날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근정전을 쳐다본 적이 있다. 빗물이 박석 틈 사이로 흘러내려 배수로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근정전(勤政殿)이란 이름은 왕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라는 뜻이 담겨있다.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어놓고 왕에게 설명하기를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보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이라고 했다.
음악소리는 경회루 쪽에서 들려왔다. 근정전 왼편을 지나 작은 문을 통과하자 수정전이란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나타났다. 수정전을 배경으로 무대 위에서 ‘심쿵심쿵궁궐콘서트’가 진행 중이었다.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무대 뒤로 돌아가 경회루를 찾았다. 연못 위로 불빛이 반사되는 밤의 경회루는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한복을 차려 입은 젊은 여성들이 지은 지 605년 된 국보 제224호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하기 바빴다.

기자는 오래 전 중국 북경의 자금성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스케일과 웅장함에서 경복궁과는 비교가 안 됐다. 자금성은 24만평이고 경복궁은 14만평이다. 아무리 우리 한옥의 단청과 처마선이 아름답다고 해도 크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런데 밤의 경회루를 보고나서 경복궁이 자금성 못지않은 독창적인 멋과 예술적 품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자금성은 황제 암살을 막기 위해 나무를 모두 없앴다고 한다. 그에 반해 경회루는 연산군 때 심은 구불구불한 금강송이 운치를 더해준다. 연못과 소나무와 누(樓)의 완벽한 조화…. 임금이 신하와 궁녀들을 데리고 연회를 베풀던 장소답게 낭만적이면서도 장엄했다. 북악산에서 끌어온 물을 자연친화적인 순환을 통해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도록 한 점도 놀라웠다.

가장 눈에 띈 부분은 경회루(慶會樓)란 현판 글씨와 지붕을 바치고 있는 2층 누마루의 8개 기둥이다. 추사 김정희 제자 신헌이 쓴 글씨는 마치 칼을 찬 대장군처럼 과묵함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기둥의 테두리 장식에서 장인의 예술성과 배려감이 돋보인다. 안에서 밖을 내다볼 때 똑같지 않은 경치를 보여주려고 프레임의 형태를 달리 했다는 얘기다.
기자는 중학교 시절 전국초중고미술대회에서 경회루를 그려 입선한 경험이 있다. 경회루를 모델로 한 것은 아이의 눈에도 경외의 건축물로 비쳤기 때문이리라. 그로부터 환갑이 훨씬 지나 밤에 보는 경회루는 더욱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보는 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또, 세월이 얼마든지 흘러도 변함없는 감흥을 주는 것이 바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며 국보의 가치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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