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청년의 얼굴엔 ‘시대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림 속 청년의 얼굴엔 ‘시대 이미지’가 담겨 있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9.29 13:00
  • 호수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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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청년의 초상’ 전
▲ 전시에서는 그림·조각·사진 등 근현대 작가가 그린 작품들을 통해 시대별 청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문신의 ‘자화상’.

이수억‧박수근‧백남준 등이 청춘 묘사한 근현대 작품 통해 위상 변화 조명
문신의 ‘자화상’엔 망국의 슬픔이… 박강원 ‘압구정동’엔 X세대 쓸쓸함 가득

“나랑 좀 닮은 거 같지 않아요?”
지난 9월 22일 서울 대한민국박물관에서 만난 양대열(78) 어르신은 전시된 한 장의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양 어르신은 그림 속 구두닦이 소년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살짝 눌린 코 등 그림 속 인물이랑 묘하게 비슷했다. 이수억의 ‘구두닦이 소년’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김 어르신은 “이때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다들 눈에 절망감이 가득했다”면서 “그때의 나에게 참 잘 버텼다며 격려해주고 싶다”고 말하면서 한동안 그림을 떠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청춘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청년들의 사회적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조명하는 ‘청년의 초상’ 전이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11월 1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문신‧이수억‧박수근 등 한국 현대 미술사의 선구적 작가들, 20세기 후반 우리 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백남준‧임옥상‧오윤‧신학철‧박불똥, 그리고 최근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김아타, 정연두, 양아치, 이동기, 김기라, 손동현 등 젊은 작가의 미술 작품은 물론, 임응식‧주명덕 등 사진작가들의 대표작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청년의 이미지를 만나볼 수 있다.

▲ 고희동이 그린 잡지 ‘청춘’의 표지

먼저 1부 ‘근대의 아이콘, 청년’에서는 개항기·일제강점기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현재 80~90세 어르신 세대에 속하는 이 시기 청년들은 문명개화, 국권 회복 등을 위해 애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명과 유행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고희동이 그린 잡지 ‘청춘’의 표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청춘’은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를 목표로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로 고희동은 늠름한 조선의 청년이 호랑이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으로 청년의 기상을 표현하고 있다.

문신의 ‘자화상’도 눈여겨볼 만하다.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든 자신의 옆모습을 그린 그의 작품에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청년의 비극과 분노가 잘 담겨 있다.
이어지는 ‘전쟁과 청년’에서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대에 군인으로, 지식인으로, 생활인으로 어느 누구보다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청년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이수억의 ‘구두닦이 소년’ 외에도 지식인 청년의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박수근의 ‘책 읽는 남자’, 전쟁 후 복구 시대 대학생의 진지한 모습을 담은 장우성의 ‘청년도’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습작처럼 연필로 스케치하듯 그린 박수근의 ‘책 읽는 남자’는 시대 분위기에 눌려 나약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의 슬픔이 잘 녹아 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독재정치에 맞서 저항했던 청년을 다룬 작품들을 소개하는 ‘저항, 그리고 청년문화’에서는 4·19혁명 5주년 기념식을 포착한 사진을 토대로 청춘의 모습을 그린 김호석의 ‘침묵시위’와 최민화의 ‘분홍-개같은 내인생’, 임옥상의 ‘김귀정 열사’ 등 민중미술 계열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또 ‘영자의 전성시대’, ‘사랑의 스잔나’ 등 이 시기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한국영화 포스터도 나란히 전시해 당시 분위기를 재현했다.

1990년대 청년들의 모습을 모아놓은 ‘신세대, 다원화된 사회의 청년’에서는 군사정권이 물러난 후 본격적인 소비문화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은 1990년대 초반 새로운 소비문화의 키워드였던 ‘압구정동’을 소재로 한 박강원의 ‘압구정동’이다. X세대(1965∼1976년 출생한 세대)의 상징이었던 압구정동의 고층빌딩과 그 앞을 서성이는 청년들을 포착한 작품은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잘 보여준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개별화된 청년, 그들은 동일하지 않다’에서는 IMF 이후 새롭게 ‘구조조정’된 한국 사회에서 어려움에 처한 청년의 위상, 그러한 상황을 넘어 새롭게 도전하는 청년의 모습을 함께 선보인다. 이중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연출을 통해 현대인의 꿈을 다룬 정연두의 ‘비위치드샵2’(Bewitched#2)가 눈길을 끈다. 한쪽에는 대걸레를 든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바이트생이, 다른 쪽에는 같은 모델이 똑같은 자세로 창을 들고 북극에 서 있는 모습을 나란히 소개한 작품으로 이상과 현실에서 고뇌하는 청년들을 담고 있다.
또 김기라×김형규 팀이 서울시 청소관리직 9급으로 정년퇴임한 위재량 시인의 서민들의 삶을 구구절절 녹여낸 시에 힙합 음악을 입혀 만든 영상작품 ‘플로팅 빌리지_위재량의 노래_절망도 사치스러운’도 인상적이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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