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을 사놓고도 쓰지 않던 죽석은 동무 세란의 가족을 청하기로 작정한 것
별장을 사놓고도 쓰지 않던 죽석은 동무 세란의 가족을 청하기로 작정한 것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0.23 09:21
  • 호수 5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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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57>

식료품 무역상 구미양행의 축들 만태와 죽석 부부의 권고를 받아 한데 어울리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적당한 별장터를 구하고 있던 남편 만태가 장사 일로 만주를 여행하다가 관북지방에 들렸던 길에 주을 산골에다가 한 채의 별장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온천에서 삼 마장쯤 들어간 산골은 망명해 있는 외국 사람의 부락 ‘노비나’촌(편집자주-함경북도 경성 주을온천에 위치한 러시아인 별장촌)이라는 것인데 여름이 되면 그 부락이 피서지로 변해서 도회에 있는 외국인들이 한동안 모여들고는 했다. 마침 영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별장이 팔리게 된 것을 알고 만태는 공교롭게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원체 헐값이었던 까닭에 굴러온 호박이라고 욕심을 낸 것이었으나 막상 집안을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얼마나 많은 가족을 위해서 설계한 것인지 넓고 횅횅해서 적은 식구에게는 도저히 부적당할 뿐 아니라 쓸모가 적음을 느끼게 되었다. 식구래야 죽석과 단 두 부부뿐인 것이니 아무리 시원스런 피서라고는 해도 넓은 마당에 단 두 마리 자웅의 닭이 어실거리는 격이어서 집 한구석에서 남편이 차를 끓여 오라고 소리를 쳐도 다른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그것이 문밖을 스치는 바람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대도 걱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원이던 별장을 사놓고 쓰지 않는 것도 멋쩍어서 한여름 동안 우선 시험을 해볼 결심으로 부부 협의의 결과 죽석은 동무 세란을 생각하고 그들 가족을 청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세란은 기쁜 소식에 귀가 번쩍 뜨이며 막역한 사이라 물론 사양할 것도 없었으나 그것으로써 현마에 대한 피서의 구실이 확적히 선 것을 기뻐해서 생각 여부가 없이 그 자리로 무릎을 쳤던 것이다. 현마에게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윽박아 대서는 결국 그 모처럼의 호의를 받게 되고 우물쭈물 망설이던 피서행이 순식간에 해결을 본 것이다. 죽석과 세란이 친한 것만큼 현마는 만태와 벗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도 그다지 찌뿌듯할 것은 없었으나 어떻든 이미 현마가 함락한 이상 단주쯤은 세란의 앞에 문제도 아닌 것이요, 미란도 그것이 바다가 아니요 산속이라는 점에서 귀가 솔곳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쾌활한 미란으로서도 여름 한철의 해수욕장의 풍경만은 견딜 수 없었다. 구라파주의를 대체로 찬동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남녀들이 벌거벗고 원시의 풍속을 과장하면서 육체와 청춘을 자랑하는 듯이 모든 생각을 육체 위로만 유혹하고 인도하는 것을 상스러운 풍습으로만 생각하는 미란에게는 피서지로서는 바다보다는 산이 항상 그리운 곳이었다. 그러기에 죽석의 별장 제공의 일건이 사실 달갑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영훈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망설이던 마음에 공교롭게도 제물에 그런 우울한 심사가 해소되고 별장으로 떠나게 되게 한 사건이 생긴 것이었다.
세란의 성화에도 잠자코 생각에만 잠기면서 하루 저녁 저물어 가는 뜰을 창으로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저녁 기운이 안개같이 자옥한 속에서 뜰도 푸르고 창도 푸르고 미란의 마음도 푸르렀다. 푸른 것은 바다같이 먼 것을 실어오면서 아득한 생각이 마음 기슭을 아물아물 감돌았다. 그 아물아물한 것을 노리고 있노라면 줄을 타는 광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위태위태한 느낌이 나면서 당돌하고 신기한 생각이 차례차례로 마음을 스친다. 보통 때에는 생각도 못하던 당치도 않은 대담한 광경의 토막토막이 요지경 속의 그림같이 펀득펀득 지나는 것이다. 수풀 속이 나오고 바닷속이 나오고 기선 속의 방 한 간이 나오고 절벽 위가 나오고――환영이라는 것이 대개 그런 것이지만 연락도 관계도 없는 산만한 장면의 토막이면서도 그러나 그 장면마다 반드시 영훈과 자기의 자태가 어리는 것이며 두 사람은 마치 딴 세상 사람들같이 그 속에서 자유롭고 때로는 부끄러운 시늉을 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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