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끊어 버리려다가, “미란 씨, 미란 씨!” 하는 목소리로 문득 귀가 뜨이면서…
홧김에 끊어 버리려다가, “미란 씨, 미란 씨!” 하는 목소리로 문득 귀가 뜨이면서…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0.27 13:51
  • 호수 5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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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58>

[백세시대]

일상에 막연히 원하고 바라던 희망이 간단히 밤 꿈속에 나타났고 꿈에서 밀려난 대부분의 희망은 그런 때 그런 혼몽한 의식의 틈을 타고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상천외한 대담한 그 마음의 그림에는 사실 번번이 귓불이 발개지고 얼굴이 달면서, 바로 그때 등 뒤에 사람이 있어 그 붉은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마음이 서성거려져서 미란은 잠깐 방 안을 살피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곤 했다. 바닷속같이 자옥하게 검푸른 속에서 여전히 영훈의 환영의 계속을 찾게 되어서 오늘은 왜 이리도 번잡하게 그의 그림자가 떠오르는고 하고 마음이 분주할 때 별안간 벽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홀연히 나타나기 시작하던 환영을 훌몰아 버렸다. 얄궂은 전화라고 탄하면서 수화기를 들었을 때 반드시 얄궂은 전화가 아니었던 것은 의외에도 거기에 역시 영훈의 꿈이 연속되어 나타난 까닭이다. 전화는 바로 영훈이었던 것이다.
“누구세요…….”
아련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란은 꿈을 뺏긴 심술도 덮쳐서 퉁명스럽게 재촉할 때,
“모르시겠어요. 알아보세요.”
목소리는 여전히 가늘고 아련하다.
“이름을 대세요, 얼른.”
주제넘게 사람을 놀리는 셈인가 하고 홧김에 끊어 버리려다가,
“미란 씨, 미란 씨!”
하는 목소리로 문득 자기를 찾아낸 듯 귀가 뜨이면서 수화기를 바싹 귀에다 대었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로는 자기의 이름이 가장 귀 익은 것이고 정답게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란은 자기의 이름의 발음으로 그것이 영훈임을 알아맞힌 것이었다.
“누군가 했죠. 겨우 알았어요, 용서하세요. 난 또…….”
“그렇게두 몰라주세요. 가제 맡은 교실의 학생들 이름만큼두 기억하시지 않는 모양이니.”
원망하는 독한 어조――무척 반갑다.
“너무 잘 기억하구 있으니까 되려 모르나 봐요. 지금두 막 창 기슭에서 누구 생각을 하구 있었게요. 목소리가 왜 그리 가늘어요. 그러니까 대뜸 못 맞혀 냈죠. ――대체 어디 계세요. 언제 오셨어요.”
“어디 있는지 맞혀 보시면 얼마나 용하실까.”
“학교.”
“천만에요.”
“찻집.”
“찻집에서 하는 목소리가 왜 그렇게 가늘겠어요.”
“그럼――.”
“목소리가 가늘 이치를 생각해 보시죠. 목소리라는 건 멀수록 가늘지 않아요. 지금 이렇게 큰 목소리로 지껄여두 미란 씨 귀에는 그렇게 작게 들리지 않습니까.”
“시내가 아니란 말씀이죠.”
“제 목소리는 지금 수천 리 길을 걷고 있답니다.”
“머니나. ――그럼 아직 이곳에 돌아오시지 않으셌단 말예요. 난 또…….”
“제 목소리는 지금 자꾸 수천리 길을 걷구 있어요. ――산맥을 넘구 들을 닫구 강을 건너구 서울을 지나구 철로를 타구 미란 씨의 귀를 향해서 뒤를 이어 휭휭 내빼구 있어요. ――그러게 그렇게 가늘구 아득하구 멀게 들리죠. 내닫는 동안에 바람에 불리구 새에게 쫓기구 공기에 얼구 하느라구…….”
“대체 어디세요, 얼른 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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