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 있는 곳이 바로 피서지로 택해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그곳일 줄야
영훈 있는 곳이 바로 피서지로 택해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그곳일 줄야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1.03 14:25
  • 호수 59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59>

“서울서두 기차를 타구 동해안을 끼구 북쪽으로 하루를 더 온 곳. 천리가 넘는 먼 산골. 미란씨가 계신 곳과는 엄청나게 다르구 먼 곳. 기차 속에서 바라본 그 첩첩한 산과 강과 벌판이 지금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것을 생각하면 사실 이 전화두 거짓말 같구 미란 씨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이 신기해 못 견디겠어요.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미란 씨의 자태를 생각하면서 그 사이에 놓인 그 많은 거리와 장애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안타까워요. 그 먼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목소리가 울려오는 것인지 그 목소리에는 미란 씨의 입김과 체온이 숨어서 그것이 외줄 철사를 타구 수천 리를 달아오구 있겠죠.”
“그러니까――.”
“아시겠죠. ――사람들은 피서를 하느라구 이 고명한 피서지를 자꾸 찾아 와서는 산속을 번화하게 하구 온천 거리를 흥청흥청하게 해 놓지만 그런 것이 제겐 다 관계없는 것같이 전 외롭구 적적하구――그러기 때문에 오늘 별안간 건 이 전화두 용서하세요.”
“그러니까 바로――.”
영훈의 지금 가 있는 곳이 바로 자기들이 피서지로 택해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그곳일 줄야 어찌 알았으랴. 불유쾌한 기억을 씻어 버리기 위해 그가 거리에서 실종을 하고 그런 먼 온천지에 가 있음이 그로서는 자연스런 일이겠으나 우연히도 자기들의 목적지와 일치되었음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집은 온천에서두 제일 큰 여관. 지금 객실에는 저 혼자만이 있을 뿐 복도에는 간간이 하녀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구 창밖으로는 저무는 개울물이 내다보이며 흰 반석 위에 낚싯대를 드리운 한가한 강태공들이 왼종일이래두 유유히 서 있는 것이 보이구 건너편 언덕 위 초가에는 좀 있으면 노오란 저녁 등불이 켜질 테구 전 막 저녁 목욕을 하구 나온 판이라 몸이 이렇게두 시원하구…….”
먼 곳의 정경을 손에 잡을 듯이 들으면서 미란의 마음이 뛰노는 것이나 민망한 걱정도 솟아서,
“장거리 전화를 거시면서두 왜 이리 장황하게 말씀하세요. 미안해서 못 배기겠어요. 용건만 말씀하세요.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하신 것이라면 그만 ――.”
“장거리 전화란 왜 용건만을 말하란 것인가요.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건 것이 아니구 미란 씨의 목소리를 들어볼 양으로――제가 요새 날마다 생각하구 있던 게 무어게요.”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안심두 되구요. 아무 기별 없이 감쪽같이 사라지신 걸 알구 오늘까지 얼마나 걱정이 된 줄 아세요. 그러던 것이 별안간 이 전화――.”
전화로는 마주 대면했을 때의 스스러움이 없어서 무슨 말이든지 부끄러운 것 없이 지껄일 수 있는 것 같았다. 미란이 실토를 했음으로 말미암아 전화는 다시 장황하게 계속되었다.
“그날 연구소에서 당한 봉변쯤은 잊어버린 지 오래예요. 그것을 잊기 위해 딴 생각――용서하세요. 미란 씨를 생각하기루 한 것이 요새 와서는 미란 씨가 모든 생각을 전부 차지하게 됐거든요.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꾸만 생각나서 자나깨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노라면 이상스런 것은 되려 깜박 잊어버려져요. 얼굴이 잊혀지구 목소리가 잊혀지구――오늘두 아침에 잊혀진 미란 씨의 목소리가 진종일을 두구 생각해야 귓속에 떠올라야 말이죠. 땀을 흘리구 생각하다가 결국 까마아득하구 멀기에 기어코 이 전화를 건 것이에요. 지금 이 맘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몰라요. 이 장거리 전화는 그런 뜻인 것이지 결코 용건이 있어서 건 것이 아니에요. 목소리를 더 들려주세요. 수천 리를 날아오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신기한지…….”
영훈이 전례가 없이 수다스럽고 장황한 것도 대면이 아니고 전화의 중매를 중간에 세운 까닭일까. 놀라리만큼 다변한 영훈의 오늘의 태도는 여간 심상한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것이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마음속에 묵었던 감정을――대면해서는 말하기 거북한 하소연을 전화로 하는 것이 아닐까. 기다려 오던 마음의 증거를 얻은 듯 미란은 흥분되어 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