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풍자한 인간세계 ‘유쾌’
음식으로 풍자한 인간세계 ‘유쾌’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11.03 15:00
  • 호수 5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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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미술관 ‘먹기, 즐기고, 사랑하라’ 전
▲ 테리 보더의 ‘꽃을 건네는 마음’

테리보더의 철사 구부려 만든 작품 90여점 선봬

[백세시대=배성호기자]한 남자가 딸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남자친구와 함께 방안에 있었던 딸은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남자는 근엄한 목소리로 두 사람 사이 아무 일도 없었냐고 묻고, 딸은 단지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라 항변한다. 딸과 남자친구를 매섭게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넘치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람객들은 큰 웃음을 짓는다. 남자와 딸은 감자칩에 철사를 구부려 팔다리를 붙인 캐릭터고 딸의 남자친구는 경쟁회사의 과자를 의인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철사를 이용해 캐릭터를 만드는 ‘벤트 아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12월 30일까지 미국 사진작가이자 벤트 아티스트인 테리 보더(52)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먹고, 즐기고, 사랑하라’ 전에서는 철사와 음식, 일상용품으로 만든 벤트 아트를 찍은 사진 62점을 비롯, 입체 작품, 애니메이션 등 90여점을 선보인다.

보더는 이색 경력을 가진 작가다. 대학 졸업 후 광고 사진작가로 14년간 근무하다 염증을 느낀 그는 사진 일을 그만두고 먹고살기 위해 제빵기술을 배워 식료품점에 취직했다. 다만 그의 상상력은 멈추지 않았다. 일이 끝난 뒤 틈틈이 반죽이나 구워진 빵으로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식료품점에 있는 레몬이며 소스 등 온갖 제품들 역시 상상을 표현할 재료로 변모했다.

이렇게 만든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렸고 입소문을 타며 팬들을 모으게 됐다. 그의 작품을 담은 사진집은 현재 10종 이상 출판됐으며 브라질, 중국, 프랑스, 러시아, 필리핀, 독일, 영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빵, 과자, 계란, 과일, 수저, 손톱깎기, 립밤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나 사물이 등장한다. 그는 이런 친숙한 사물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연결해 평범한 사물에서 사람의 삶과 그 속에 담긴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땅콩버터 바른 빵이 축구를 하고 딸기 쨈을 바른 빵과 데이트를 즐긴다. 땅콩이 답답함을 해소하듯 가슴을 열고 속을 내보이는가 하면 골프공은 모자를 쓰고 여행을 떠나고 말린 대추들이 마스크팩을 하며 주름을 펴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담, 사물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것이다.
단순히 삶을 재현하기만 하지 않는다. 촌철살인으로 사회문제를 꼬집기도 한다. 흰 계란이 유색인 전용이라고 적힌 부활절 바구니 앞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담은 ‘왕따 계란’은 백인전용 표지판으로 유색인을 차별했던 어두운 역사를 비꼰다.

전시에서는 영화와 신화, 명화를 패러디한 작품도 선보인다. 노란색 설탕 장식으로 뒤덮인 컵케이크로 만든 ‘마릴린 컵케익’이 환풍기에서 치마가 휘날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은 영화 ‘7년만의 외출’의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 큰 웃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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