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굴레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정 뿐이다
시간의 굴레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정 뿐이다
  • 정재수
  • 승인 2007.10.1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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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

생명체가 가진 변화성이라는 특성은 바로 생명현상이 시간이라는 굴레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즉, 주어진 일정한 공간 내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시간성을 확보함으로써 생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는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다리고, 만나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생명체가 존재하면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에는 시간성을 포함하고 있다.

생명분자 뿐만 아니라 개체 수준에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는 그 자체가 목적과 인과, 상호작용에 의해 제한돼 있고, 그 속성은 주어진 시간 내에서만 발현될 뿐이다. 따라서 생명체란 일정한 시간적 한계 내에서 살아가며 주위와 관계를 맺어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의 상수’ 즉, 결합상수는 50억분의 1이고 만나면 헤어져야하는 해리(解離)상수는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아니면 ‘절대영’(絶對零)이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소망이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주치고 어울리다가 헤어져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좋아한 사람, 싫어한 사람, 그냥 마주친 사람들에 상관없이 우리는 만났다가 헤어져야 한다. 다만 보다 좋아한 사람과는 더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어 하고, 천생연분인 짝은 반려자 삼아 평생을 같이 하고자 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별이라는 단어, 헤어짐이라는 과정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고, 마치 영원히 같이 살 것 같은 소망 속에 나날을 보낸다. 부부가 그렇고, 가족이 그렇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 제자, 친구가 다 그렇다.

그러나 결국은 헤어진다. 죽음이라는 엄숙한 과정에 의한 이별도 있겠지만, 사회 환경적 요인에 의한 헤어짐도 많지 않은가. 그것은 만남이라는 의미에 시간성이 깃들여 있고, 그 시간성은 헤어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때, 삶이라는 공동선을 달성하는데 필요하다면, 반드시 떠나야 한다.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희구하면서도 부득이 떠날 수밖에 없을 때 가슴을 졸이면서 발길을 돌리지만 떠나야함은 분명하다.

생체분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생체분자의 경우는 재회란 없다. 분자의 이별은 종결이다. 생체분자는 만나면 반응을 하여야 하고, 반응을 하고 나서는 바로 없어져야 한다. 대사적 반응의 경우 특히 심하다. 반응을 하고 나면 화생을 통해 전연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바탕에서 백세장수를 하신 어르신들의 생명관을 살펴본다. 백세인들은 다른 일반인들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간적 혜택을 많이 받은 분들이다. 이 분들의 시간개념과 가족개념은 어떠할까? 오래오래 살다보면 삶에 대해 싫증이라도 내지 않을까?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지겨움을 느끼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백세인은 대부분 현재도 자신의 삶에 대해 충실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가족과 이웃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떠날 준비를 담담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백년을 살았어도 이승에서 못다 한 일을 저승에 가서라도 하고 싶다는,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애틋한 기다림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 결코 이제 그만이라고 포기해 버리는 법이 없다. 시공간의 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년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정(情)이라는 특별한 해법을 본다. 항상 변함없이, 아니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워하고 반가워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은 나이라는 시간적 굴레를 벗어 버렸다. 사람살이의 가장 근원이 되는 본성, 즉 서로를 그리워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니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모든 물리적 현상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인간을 자랑스러운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속박되어있으면서도 인간은 항상 미래를 기다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장수하신 분들을 보면서 시간의 조건인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명제가 새롭게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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