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의 선비론-옥당(玉堂) 선비 언관(言官)과 직간(直諫)의 전통
이동희의 선비론-옥당(玉堂) 선비 언관(言官)과 직간(直諫)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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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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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사관(史官)은 예문관(藝文館)의 선비로서 어전회의 때 국왕 가까이 앉아 위정자들의 언행과 정책발언을 기록해 훗날 그 왕의 업적을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국왕과 대신들의 언행과 정책결정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그 정책을 바로 잡아 다시 거두어 드리게 하는 직책도 있다.

 

그것은 바로 옥당 선비인 언관(言官)으로 대쪽같은 사간원(司諫院)선비들이다.


아무리 문정전의 어전회의에서 합법적으로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조선조의 국시인 유교적 성리학 원리에서 벗어나면 옥당 선비인 언관은 국왕 앞에서 “폐하!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직간(直諫)한다. 이것이 바로 추상같은 대간(臺諫)이고 상대(霜臺)라 한다.

 

모든 신하들은 국왕 앞에서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데 오직 언관만은 머리를 올려 눈높이를 국왕의 눈높이에 맞춰 큰 소리로 외쳤다.


서거정(徐居正)은 사간원의 옥당선비들이 국왕 앞에서 당당하게 직간(直諫)하는 장면을 보고 “벼락이 떨어져도, 도끼로 목을 쳐도 서슴지 않는다”는 선비의 기개에 탄복했다.

 

“어찌 백성들에게는 무속(巫俗)을 믿지 말라고 하면서 왕궁에서는 매일 같이 소격소에서 굿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국왕은 홀로된 대왕대비께서 오늘날 오페라 구경하는 정도라고 생각해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그리고 사간원(司諫院)의 막강한 사대부들이 합동해 대궐 앞에서 농성 데모를 한다.

 

그것이 유명한 삼사합계(三司合啓)이다. 국왕의 언행, 통치 노선을 감시하고 수정을 요청하는 충성스러운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몇 달이 걸린다. 결국 국왕이 청종(聽從) 즉 “듣고 따라야지” 그 왕권 자체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격소는 결국 없어졌다.


이것이 ‘할말은 해야 한다’는 선비의 기질이고 기개(氣槪)이다. 이러한 직간(直諫)의 전통이 조선조를 맑게 오래도록 유지해 왔다.

 

즉 기록정치, 직간문화 그리고 감찰제도가 있어 500년 사직을 유지했지 총칼로는 한 체제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투명한 왕궁의 엄격한 법도가 있었기에 백성들이 믿고 따라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맹자에서 영향을 받았다.


민위중(民爲重) 백성이 제일이고, 사직차지(社稷次之)정권은 그 다음이고 군위경(君爲輕)이라, 왕도 부도덕하면 먼지보다 가벼워서 날려 보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조에는 폭군정벌론(暴君征伐論)이 헌법상 정당시 되어 있어서 반정이 두 번이나 있었다. 아무리 한명회가 예종 성종의 부원군으로 영의정의 권세를 누렸지만 그는 성종 26년 동안 107회의 탄핵을 받았다. 이것이 사헌부의 기풍(紀風)이고 선비정신의 전통이다.


성삼문은 대표적 언관이다. 언관은 위로는 임금의 잘잘못을 가리고 아래로는 대신들의 시비를 따져야 했는데 수양의 거사를 막지 못해 38세에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또 중종 때 조광조는 언관으로서 유교적 원칙을 고수하면서 서릿발 같은 기개로 37세에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후에 조선왕조의 도덕적 파수꾼으로 역사에 기리 남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인 중에는 이런 대간들이 얼마나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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