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라영수 ‘은빛둥지’ 교육원장
[인물포커스] 라영수 ‘은빛둥지’ 교육원장
  • 정재수
  • 승인 2007.12.21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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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배움터”

경기 안산시에 자리한 순수 비영리민간 어르신 정보화교육기관인 ‘은빛둥지’는 지난 2001년 창립 이후 눈부신 활약으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3700여명의 어르신들이 컴퓨터를 배워 나갔고, 지금은 컴퓨터는 물론 방송용 카메라를 이용해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하고 있다. 은빛둥지 회원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전시하는 ‘황혼의 길손’ 전시회는 겨우 2회째를 맞이했지만 유명세를 타며 어르신정보화교육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은빛둥지를창립해 이끌고 있는 라영수(67) 원장을 만났다.

 

IMF 시련극복 위해 컴퓨터 입문, 어르신 IT전도사로 변신
“디지털은 참 편리한 기술… 젊은이 아닌 노인 위한 세상”


▶‘은빛둥지’는 어떤 단체인가.
경기 안산시 본오동에 자리한 순수 비영리민간 어르신 정보화교육기관이다. 은빛둥지는 어르신들의 정보화 교육을 주요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01년 9월 창립돼 2003년 11월 경기도에 등록됐다. 현재 178명의 어르신들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고, 창립 이후 현재까지 7년여 동안 모두 3700여명의 어르신들이 정보화 교육을 수료했다. 2004년 2월 경기도 여성발전기금 지원사업으로 승인돼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2005년 1월에는 정보통신부 ‘노인정보화교육기관’으로 지정됐다. 특히 올해 3월, 회원 가운데 여성들을 중심으로 ‘할머니도 할 수 있다’는 독립 프로덕션을 구성해 여성가족부의 지원 아래 동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은빛미디어’를 설립해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은빛둥지’를 창립한 계기는.

서울대 수원농대를 졸업한 뒤 캄보디아를 오가며 ‘미작(米作)개발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는 벼의 원산지인데다 캄보디아는 벼의 성장환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기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캄보디아와 수교를 원하는 우리 정부가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내가 추진 중인 미작사업을 지원키로 했다. 당시 수출입은행에서 지원금을 건네받기만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찰나에 IMF가 들이 닥쳤다.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정신을 한 곳에 쏟기 위해 안산공과대에 입학해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2개 싸들고 아침에 등교해서 오전, 오후반을 모두 수강하고 밤늦게 귀가하곤 했다. 우연히 상록구 본오동 자치센터에 마련된 컴퓨터로 어르신들을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조경숙(78) 현 부회장을 비롯해 10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 은빛둥지다. 2003년 10월에는 한양대로부터 중고컴퓨터 100대를 기증받아 규모를 갖출 수 있게 됐다.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은빛둥지에는 모두 4개의 동아리가 있다.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동아리가 컴퓨터반이다. 초급(2개반)과 중급(2개반)을 거치며 한글과 인터넷, 엑셀과 파워포인트, 홈페이지 제작도 배운다. 초중급반에서 기본기를 익히고 난 뒤에는 컴퓨터 고급반 과정과 함께 ‘황혼의 길손’ 반에 편성돼 디지털 카메라 사용법을 비롯해 사진을 컴퓨터로 손질하는 ‘포토샵’ ‘플래시’ 등 응용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힌다. 회원들이 직접 사진을 찍은 뒤 포토샵을 이용해 완성도를 높인다. 2006년 3월 개강 이후 2번의 전시회도 개최했다. 최고 수준급 과정은 ‘할머니도 할 수 있다’ 사업으로 시작한 ‘은빛미디어’ 반이다. 10명의 정회원 모두 할머니다. 방송장비가 무겁다보니 짐꾼(?) 겸 회원으로 할아버지 3명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춤패’가 있다. 20명으로 구성된 춤패는 장수춤을 바탕으로 실력을 연마해 수준 높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전시회가 유명한데.

2006년 3월 개강한 ‘황혼의 길손’ 반은 노인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했다. 개강 이후 7개월 만에 서울 시청역 지하대합실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로 회원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현재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황혼의 길손’ 반은 지난 4월에 제2기 개강식을 가졌고, 10월 두 번째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회 당시 회원들이 직접 도록(圖錄, 전시된 사진을 한 데 모아 엮은 책)을 만들어 배포했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하다. 웬만한 사진작가들도 도록을 갖추고 전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단한 일이다. 특히 회원들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대부분 시중에서 20~30만원에 구입할 수 있는 저가형 제품이다. 공연히 장비에 돈들이지 말고,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카메라로 실속 있게 활동하자는 취지다. 싸구려 카메라면 어떤가, 경로당에서 막걸리 부어 놓고 화투나 치던 어르신들이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사진전시회를 여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라영수 원장과 조경숙 부원장.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는데.

은빛미디어 회원들은 최근 ‘염석주를 찾아서’라는 타이틀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사실 은빛미디어는 노인들의 눈으로 본 세상을 노인들의 손으로 촬영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만든 동아리다. ‘염석주를 찾아서’는 그 첫 번째 사업이다. 염석주 선생은 수원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왔고, 이후 상록수 최용신 선생의 농촌계몽운동을 돕다가 만주로 건너가 흑룡강성에 90만평의 논을 개간해 독립군에 군량미를 조달하며 신간회 활동을 했던 독립투사다. 어찌하다 일본순사에게 발각돼 1944년 4월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돼 순국하셨지만 이후 ‘빨갱이’라는 누명을 써야 했고, 그 자손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최근 ‘은빛미디어’ 회원들이 일주일 동안 중국 흑룡강성으로 날아가 염석주 선생의 자취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고, 내년 1월말 완성해 KTV와 RTV에 제공, 방영할 예정이다.


▶회원들이 어려워하지 않나.

컴퓨터는 노인의 것이다. 노인들의 경험은 정보다. 이 정보를 컴퓨터를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전수해서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보화다. 예전에 영화감독이 되려면 그 감독 밑에서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며 조수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에는 맘만 먹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감독이 될 수 있다.


▶전시회를 하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노인이라면 누구나 디지털 기술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자극을 주고 싶었다. 정통부와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노인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 현재 전국에 은빛둥지와 같은 노인단체가 5~6개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과 연계해 함께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 2005년 ‘한국시니어아이티연맹’을 설립하기 위해 총회까지 개최했지만 경제적인 여력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먼저 연합체가 형성된다면 일본과 중국의 노인단체와도 연계해 아시아 연합체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은빛둥지는 이미 일본과 중국의 노인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은빛미디어 회원들은 동영상을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의 기종이 최고급 사양이라야 한다. 시청에 컴퓨터 지원을 요청하면 담당 공무원이 ‘인터넷이나 되면 됐지…’라는 말투로 퉁명스럽게 거절한다. 이 노인들에게 고급 컴퓨터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인 스스로 자각하고, 함께 참여해야 한다. 대학교수들이 일본과 미국 책 베껴 옮겨놓은 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 지금의 어르신들은 노는 방법도 잘 모른다.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컴퓨터도 몰라서 못하는 것이지 하기 싫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보다 많은 노인들이 노인신문화운동에 동참해 생산적인 노인으로 변모하고, 사회에 기여하길 바란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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