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경리 토지문학공원’ 방문기
[기고] ‘박경리 토지문학공원’ 방문기
  • 정재수
  • 승인 2008.01.1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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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의지로 집필한 대하드라마

젊은 시절 밤잠을 설쳐가며 읽었던 ‘김 약국의 딸들’, ‘표류도’, ‘시장과 전장’ 그리고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로 명성을 떨친 박경리<사진> 선생. 문득 현 노년층과 삶의 궤적을 함께 한 박경리 선생의 근황이 궁금해 인터뷰를 계획했다.

박경리 선생과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토지문학관으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비서는 박경리 선생님께서 근래 건강이 좋지 않아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토지문학공원에 가면 선생의 작품활동을 비롯해 모든 흔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최근 ‘토지문학공원’이 있는 강원 원주시를 향해 떠났다.

토지문학공원관리사무소에서 고창영 소장과 인사를 나눈 후 곧 바로 해설가의 안내를 받으며 공원으로 향했다.

3000여평의 아담한 토지문학공원은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간도 용정까지 3000여리를 무대로 펼쳐진 대하소설 ‘토지’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원으로, 박경리 선생의 옛집과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용두레벌 등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박경리 선생의 옛집은 16년 동안 살면서 ‘토지’ 4, 5부를 완성한 집필실과 살림살이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실, 문학 및 동호인들의 사랑방으로 활용하고 있는 2층으로 된 양옥으로 원형은 그대로이나 내부와 외벽은 보수했다고 한다.

평사리 마당은 소설이 시작되는 평사리 마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곳으로 섬진강을 상징하는 맑은 개울, 선착장, 둑길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또 평사리 동네 언덕인 홍이동산이 잘 그려져 있고, 용정으로 떠나가던 여정을 용두레벌로 표현했다.

2층 전시실에는 ‘토지’의 집필과정 및 구성, 국내외 문학계에 끼친 영향과 명 구절 소개, 연도 및 출판사별로 발행된 책자와 육필원고, 완간본이 전시돼 있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26년에 걸친 집필 끝에 완성된 1~5부 21권 분량의 방대한 대하소설이다. 몇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번역의 미비로 빛을 보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국내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대하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한 불후의 명작이다.

소설 ‘토지’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등이 지나간 1897년 한가위부터 광복의 기쁨을 맛본 1945년 8월 15일까지 한국 근대사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경남 하동 평사리라는 전형적인 한국농촌을 비롯해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에 걸친 광활한 국내외 공간이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이다.

강원 원주시에 자리한 토지문학공원 전경.

원고지만 3만매가 넘는 분량의 역작인 동시에 역사와 운명의 대서사시로서 한국인의 삶의 터전과 개성적인 인물들의 다양한 운명적 삶과 고난, 의지가 민족적 삶으로 확대된 대표적인 수작이다.

마치 ‘토지’의 주인공들처럼 각고의 인내, 용기와 집념의 역정을 살아온 박경리 선생은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텃밭에 채소농사를 지으며 독거하면서 ‘토지’ 4, 5부를 집필해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현재 박경리 선생이 기거하는 토지문학관에는 세미나실과 소설토지학교를 개설해 문하생을 길러내며 국내외에 ‘토지’를 알리는 산실이 되고 있다.

이번 현지방문을 통해 박경리 선생은 83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문학에서는 대가로 성공했으나 여자의 행복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무거웠다.

선생은 1946년에 결혼해 1950년 남편의 죽음, 뒤 이어 아들의 죽음, 사위 김지하씨 구속으로 인생굴절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위대한 문학작품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문학적 소질과 강직한 성품, 불굴의 정신, 인내력 덕분이었다.


안만식 기자/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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