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행이 결정되자 그것만으로 집안은 별안간 번잡해져서 각각 행장을 꾸몄다
피서행이 결정되자 그것만으로 집안은 별안간 번잡해져서 각각 행장을 꾸몄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1.10 11:13
  • 호수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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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 소설 화분[60]

“아무리 말을 해두 말로는 외려 부족해요. 하루를 말한들 한 달을 말한들 맘이 시원하겠어요. 오늘 저를 다따가 놀라게 해주신 것같이 저두 며칠 있으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 테에요.”
“어떻게요. 전화로요?”
“전화보다 더한 것. ――살며시 등 뒤에 나타나서 아웅 소리를 질러 드릴 테에요.”
“제 등 뒤에 나타나서요?”
“그럼은요. 바로 선생님 등 뒤에――.”
“이곳으로 오시단 말씀입니까.”
“거기까지 가르쳐 드리면 놀라게 하는 셈이 되나요. 참으시구 기다리세요. 이만 끊으세요. 더 묻지 마시구 끊으세요. 미안해서 그래요. 끊으시라니까요……. 안 끊으시면 제가 끊을 테에요. 노여 마세요. 끊어요…….”
그러다가는 한이 없을 것 같아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미란은 자기편에서 수화기를 걸 수밖에는 없었다. 조급해 하는 영훈의 목소리가 귀속에 쟁쟁하게 남으면서 가엾기도 했으나 그것이 그를 위하는 마음이거니 생각하고는 기쁜 판에 세란에게로 뛰어갔다.
“나두 피서 가요.”
다짜고짜로 선언하고는 원족을 떠나는 아이같이 서성거리는 것이다.
“가구 말구요. 나두 가요, 가요.”
세란은 빙그레 웃으며,
“큰 분부 내렸다. 어쩌다 별안간 맘이 내켰누. 이제야 미란이 덕에 집안사람이 모두 피서를 떠나게 됐으니.”
“작정된 바엔 내일로래두 곧 떠나요.”
“아따 쫄쫄 늘이다가 이제 와서 독판 조급히 군다.”
눈초리에 주름을 잡으면서,
“누가 전화 못 들었을 줄 알구. 한마디두 놓치지 않구 다 들었다나――. 선생과 제자의 정의가 그렇게 자별스러운 건 내 또 첨 봤어.”
“생쥐라구 남의 전화는 엿듣나. 이 투실투실한 생쥐 같으니라구.”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세란은 몸을 들었다가 금시 표정을 바로 잡는다.
“네가 부러워 못 견디겠다. 지금 내 상 위에 있는 것은 향기 높은 한 잔의 홍차가 아니구 한 접시의 비계인 것이 슬퍼 못 견디겠다. 홍차의 향기를 잊은 지가 벌써 언제든지 까마아득하게.”
“이렇게 살이 찌구두 무슨 염치에 향기를 찾아. 욕심두 분수가 있지.”
“그러게 안타깝단 말이지. 아무리 살이 찌구 나이가 늘어두 언제든지 그리운 건 그 향기! 비계를 먹은 후같이 불쾌한 때는 없거든.”
“날더러 지금 홍차의 시대란 연설이지.”
“소원대로 얼른 그 향기를 찾아 주겠단 말이다. 나두 멀리서 향기의 찌꺼기나 맡게. ――피서는 내일로 곧 떠나기로 하구.”
“내일!”
“어서 죽석한테 전화를 걸어야지.”
일어서는 세란의 엉덩이를 밀치면서 미란은 날뛰었다.
피서행이 결정되자 그것만으로 집안은 한 고패 열린 듯이 별안간 번잡해져서 각각 자기의 행장들을 꾸미는 것을 한 가지의 중대한 사업이나 하는 것처럼 필요 이상으로 정성을 들이고 힘을 들이고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기쁨으로들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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