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의 존재가 초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미란과 일이 있은 후부터였다
옥녀의 존재가 초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미란과 일이 있은 후부터였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1.17 13:43
  • 호수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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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61]

미란은 의장을 들쳐서 여름옷에다가 등산복을 준비한다 소설책을 모아 들인다 하면, 세란은 화장품에 한충의 주의를 더하고 사진기계를 수리하고 망원경을 사들이곤 하면서 그 두 사람의 법석으로 집안은 파장 후같이 너저부레하게 헤트러져서 그 뒷수습을 하는 것이 옥녀의 한 가지 덧붙인 일이 되었다. 일상의 찻그릇이며 기명에 유달리 사치한 그들이 요행 그 점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은 별장 안에 외국 사람 쓰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까닭이었다. 생활에 드는 일절의 양식도 죽석들 편에서 준비하게 되어 직접 가게에서 잼이니 소시지니 버터니 통조림이니 하는 것들을 그것만으로 한 짝의 짐이 충분히 되리만큼 흔하게 집어내고 한편 쌀과 야채를 수하물로 한 짐이 되게 부쳤고, 한 가지 딱한 것은 크림이니 잼이니 베이컨이니 설레는 그들로서 그것들이 든 푸대 속에 따로 된장과 고추장의 오지항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구라파주의에 젖어서 자나깨나 그것을 원하고 갈망하는 그들로서 오히려 된장 단지를 절대로 필요로 한 것을 보면 피부에 배어진 고향의 냄새와 빛깔을 떨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들의 주의가 철저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기는 하나 그 풍토적 양식에 한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묵묵한 인정 가운데에서 향토의 산물은 짐 속에서 의젓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미양행은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하고 있는 까닭에 만태의 요량으로는 그들이 거반 피서를 떠나 거래가 조금 삠할 때 아우에게나 가게를 맡기고 일행과는 떨어져 떠날 생각으로 우선 죽석만을 세란들의 한패와 먼저 동행시켰다. 그렇게 되니 결과로 보면 원래는 자기들이 계획하고 권고한 것이었으나 수의 비례가 너무도 기우는 까닭에 우세한 세란의 식구들 속에서는 주인과 여러 사람의 손님――세란들의 한패는 일가족속이 달려들어 주인의 자리를 뺏고 자기들만을 위한 피서를 결의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세란과 미란은 물론 현마도 제일차에 참가하게 되었고 단주만이 당분간 떨어지게 되었다. 현마도 사(社) 일과 집 건사의 관계로 단주와는 교대의 약속이어서 그의 피서의 기간은 반달 동안 단주가 집을 지키고 사 일을 보다가 교대하러 올 때까지라는 것이었다. 현마는 가장으로서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달관도 할 수 있었으나 단주에게는 그 조건이 반드시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될 수만 있다면 미란들과 함께 피서지에서 온 여름을 나고 싶어서 반지빠르게 절반의 기한이라는 것이 싫었고 빈집을 지키노라고 혼자 떨렁하게 남아 있기도 쓸쓸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을 품으면서도 결국에는 솔곳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니 썩 내키지는 않는다고 해도 역시 거기에 마땅한 숨은 마음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옥녀와 자기’――전에는 그다지 주의를 끌지 않았던 것이 어느 결엔지 새로운 제목으로서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가 몇 달 전보다는 엄청나게 자라났던 탓이요, 세상이 한결 허랑하게 넓어진 증거였다. 한번 야산으로 나서 짐승 맛을 들인 이리의 식욕 앞에는 골짝을 뛰는 한 마리의 토끼도 심상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인생을 알기 시작한 지 단시간에 우둔한 백치같이 다른 생각 다 없이 식욕만이 무섭게 날카로워지면서 어느 결엔지 이리의 악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옥녀의 존재가 시선의 초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미란과 일이 있은 후부터였다. 입이 살쪘다고 진미 이외의 것이 천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까지가 구미를 돋구어 주는 셈이었다. 단주는 원래가 악식가였고 세상에 이런 악식가는 많은 것이다. 입을 오므리고 가장 고귀하고 사치한 척 차례진 포도를 두어 알 따서 점잖게 오물거리는 것이나 기실 악식가의 소질을 다분히 갖추고 있어서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들어가면 띠를 풀고 활개를 펴고, 개구리를 들어라 뱀도 좋다, 대구입을 벌리고 갖은 악식을 도맡아 할는지 모른다. 사람치고 누구 한 사람 이 굴레를 벗어날 사람이 없을는지도 모른다. 단주도 그런 악식가의 한 사람임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차차 그 본능과 면목을 발휘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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