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노인회 경기연합회 노인대학장들 러시아 극동지역 연수기
대한노인회 경기연합회 노인대학장들 러시아 극동지역 연수기
  • 이안교 양주시 광적노인대학장
  • 승인 2017.11.17 18:38
  • 호수 5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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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경기연합회 노인대학장들은 10월 28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이종한 경기연합회장 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지역 연수를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연수단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노인회 경기연합회 노인대학장들은 10월 28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이종한 경기연합회장 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지역 연수를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연수단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역만리서 독립운동 펼친 선열 기리며 만세삼창

조선인들이 강제이주 열차 탔던 간이역… 흔적은 없으나 아픔 느껴져

연해주까지 호령했던 발해국 발자취… ‘그날 다시 올 수 없나’ 아쉬움

경기도 노인대학 연합회(회장 김태영)는 지난 10월 28일부터 11월 1일까지 4박5일간 이종한 대한노인회 경기연합회장, 경기 관내 노인대학장 등 50명이 참여한 가운데 러시아 연수를 진행했다. 이번 연수는 러시아 한인이주사 및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운동사 그리고 한민족의 자존심인 발해국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정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순박한 러시아인

양양국제공항에서 오후 3시 10분에 출발한 러시아 국적의 여객기는 2시간30분만에 러시아 하바롭스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으며 처음 대하게 되는 러시아인들은 무표정하고 무덤덤할 뿐 외국관광객에 대한 서비스정신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자 어느덧 밤에 접어들었지만 다행히 맑은 날씨에 기온도 한국의 11월 중순기온으로 여행하기에 적당했고, 대기는 맑고 신선한 느낌에 모두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레닌 광장을 거쳐 역사문화 자료 14만 여점이 전시된 향토박물관을 찾았다. 100여 년 전에 세워졌고 전시품의 규모나 자료가 세계적인 역사박물관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특히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호랑이 박제물이 눈길을 끌었다. 

2차 세계대전 전사자 추모비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관람한 뒤 러시아 재래시장을 방문했다. 거기서 털모자 등 기념품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시장 상인들도 무표정하고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그래도 느긋하고 순박한 면이 느껴졌다. 

저녁식사 후 오후 8시20분발 블라디보스토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승차했다. 1박은 열차에서 지내는 일정이었다. 2층 침대차에 몸을 싣고 밤새도록 달리다 잠에서 깨어나니 기차는 해변가를 달리고 있고 곧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까지 9288km로 6박7일이 걸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에 섰다는 사실이 무척 감회가 깊었다.

‘동방을 지배하다’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한·중·일·북한과 근접하여 무역·외교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도시지만 시가지 모습이 흡사 유럽의 도시 같은 느낌이다. 

연수 3일차, 아침식사 후 APEC 총회가 열렸던 극동연합대학, 잠수함 박물관, 니콜라이 2세 개선문을 거쳐 혁명광장으로 갔다. 드넓은 광장에 군복을 입은 군인의 동상이 사뭇 웅장하다. 

발해국 흔적으로 추정되는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 돌비석 앞에서 노인대학 학장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이종한 경기연합회장(가운데).
발해국 흔적으로 추정되는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 돌비석 앞에서 노인대학 학장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이종한 경기연합회장(가운데).

◇연해주 조선인의 발자취를 찾아

연수 4일차. 금번 연수의 하이라이트로 연해주 한인들의 이주사 및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보는 날이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신한촌 기념비’다. 지금은 좁은 공간에 초라하게 기념비만 세워져 있고 한국어조차 못하는 한인 후예 한 사람이 외롭게 기념비를 지키고 있었다. 

신한촌은 1860년대 초 20가구의 조선인이 삶의 터전을 찾아 처음 연해주 지역에 정착한 곳으로 1937년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조선인 모두를 강제 이주시킬 때까지 20여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기념비는 큰 돌기둥 세 개의 조형물로 되어 있으며, 왼쪽은 2500만 북한인을 상징하고 중앙의 비석은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을, 그리고 오른쪽은 통일한국의 한민족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기념비는 1999년 8월 15일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건립했다.

이역만리에서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선열들을 향한 이종한 연합회장과 김태영 학장의 추모사에 이어 우리 일행은 애국가를 목 놓아 부른 후 힘차게 만세삼창을 했다.

이후 한 시간여 황막한 광야를 달려 버스가 정차한 곳은 리즈돌이노예 기차 간이역. 우수리스크에 있는 이 역은 18만명의 조선인을 강제로 화물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당시 집결지로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고 기차에 태워져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이산가족이 돼야 했다. 그렇게 한 많은 곳이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과일과 먹거리를 파는 러시아 아줌마 한두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정차한 곳은 우수리스크 시립공원이다. 발해인의 흔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돌거북상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인지라 기념사진을 찍고 모두 어루만져 본다. 

다음 찾아간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붉은 바탕에 금빛글씨가 너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인간에겐 귀소본능이 강하다던가. 태어난 조국, 고향, 친지는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되나보다. 이곳 연해주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1990년에야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 후 한인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부모가 살던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한인은 4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연해주 한인 이주사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마침 우리가 들어서는 순간 귀에 익은 풍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날은 우수리스크 한인경로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한국의 경로잔치 모습 그대로였다.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가슴 찡한 모습을 보면서 이곳 동포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생가와 수이문 강변에 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를 돌아봤다. 충북 진천에서 출생한 이상설 선생은 1907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간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나 1917년 건강악화로 48세에 요절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수이문강에 띄웠다. 2001년 광복회와 고려문화재단에서 강변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는 비문을 읽고 무거운 마음으로 전원이 만세삼창한 후 발길을 돌렸다. 

이안교양주시          광적노인대학장
이안교양주시 광적노인대학장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광야가 펼쳐지는 발해성터.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장악하였던 대조영의 발해는 멸망한 고구려의 재활을 꿈꾸며 200여년을 융성하였고 한반도의 3~4배가 넘는 넓은 영토에서 자랑스러운 역사를 창조하였던 왕조였다. 허나 불행히도 쉽게 패망하며 역사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뿌듯한 마음으로 한참 구릉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현존하는 발해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아직 고증되지 않은 돌거북 석물만이 발견될 뿐 발해국의 발자취를 확인 할 길이 없다는 게 너무도 안타깝다. 언제고 찬란했던 발해국의 빼앗긴 땅은 기필코 우리 한민족이 다시 찾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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