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와 철이 들대로 든 옥녀를 남겨둠이 옳은 일일까’ 세란에게 불안이 솟았다
‘단주와 철이 들대로 든 옥녀를 남겨둠이 옳은 일일까’ 세란에게 불안이 솟았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1.24 13:41
  • 호수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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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62]

빈 집에서는 자기가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뜰도 초목도 피아노도 옥녀도 자기의 지배를 벗어나고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은연중에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 옥녀임이, 그것이 가령 미란이나 세란일 때와 비기면 월등의 손색이 있다고는 해도 그 대신 처녀지라는 신선한 식욕이 벌충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욕망도 계책도 아닌 것이요, 채 그런 것으로 나타나기 전의 숨은 마음의 이유였던 것은 물론이다. 떠나는 날은 집안이 금시에 폐가나 된 듯 세란과 미란과 현마가 빠져 나가자 방안과 뜰이 휑뎅그레하게 비어졌다. 세 사람이 각각 가방들을 들고 가벼운 차림으로 대문을 나섰을 때 그들을 보낼 양으로 나선 단주와 옥녀는 그 휑휑한 뜰을 돌아다보면서 전에 없이 집안이 넓어진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옥녀는 집안에서는 온전한 한 사람의 몫을 못보고 언제든지 한구석에 있는 둥 만 둥 숨어서 대수롭지 않은 처지에 있었던 것이 별안간 넓어진 그 집안에서는 잠깐 동안은 어떻든 네 활개를 펴고 의젓한 한 사람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굳세게 주장할 날이 온 것도 같았다. 이 방 저 방을 내 것같이 왔다 갔다 하고 화장품도 마음대로 써볼 수 있는 것이요, 뜰의 화초도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란처럼 혹은 미란처럼 집안을 참으로 내 것같이 휘둘러보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옥녀가 그런 생각에 잠길 때 단주는 집안을 돌아보고 섭섭하고 쓸쓸한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으나 그 쓸쓸한 생각을 없애려면 역시 옥녀를 바라보며 모든 다른 생각을 말살해 버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미란들의 유쾌한 자태와 피서지에서의 기쁜 날들을 탐내고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빈 집안을 한가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옥녀의 자태를 그들에게 밑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느끼면서 옥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써 유쾌한 빛을 띠우고 애정을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의 표정에서 의외에도 영향을 받은 것은 세란이었다. 세란의 민첩한 눈에는 단주와 옥녀의 자태는 문득 심상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면서 별안간 의혹과 근심이 솟는 것이었다. 
애초에 세란은 피서하는 동안 단주와 함께 있기를 원했고 당분간이라도 그를 혼자 남겨 두기를 즐기지 않았으나 형편상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미안히 여기고 있던 터에 옥녀와의 표정의 교류는 떠나는 그날 처음으로 목도한 것이어서 그 미묘한 눈치를 보고는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 것이었다. 빈집에 둘 만을――그것도 속이 무궁한 단주와 어느 결엔지 철이 들대로 든 옥녀와를 남겨둠이 옳은 일일까――병들 기회를 일부러 주는 셈이지 그들의 사이가 언제까지든지 성할 것인가――이런 불안이 솟으면서 두 사람의 나란히 선 자태를 바라보려니까 그만 여행의 구미조차 떨어졌다. 우두커니 섰는 것을 미란이 재촉해서 등을 밀치는 바람에 걸음을 떼놓기는 했으나 쏘는 듯이 날카로운 세란의 시선을 단주는 멸시하는 듯 항의하는 듯 되쏘아 붙이면서 말뚝같이 거만하게 버티고 섰었다. 남의 감정을 누그려도 보고 농락도 해보고――대체 그런 기술을 어느 틈에 배운 것일구 하면서 단주는 스스로 자기의 태도에 경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죽석들의 별장은 온천과 ‘노비나’촌과의 중간쯤 되는 언덕 허리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나촌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도 없었고 온천 거리의 번잡한 속에 휩쓸릴 것도 없어서 흡사 한적한 곳에 독립된 왕국을 이룬 감이 있었다. 온천까지는 물을 맞거나 양식을 살 때 내려가면 그만이요, 사람이 그리우면 노비나촌에 가서 멋대로 근처를 거닐면 그만이었다. 노비나까지는 두어 마장 온천까지는 삼 마장가량의 거리밖에는 안 되었다.
뜰에는 하아얀 모래를 깐 위로 사치한 사시나무가 잎새는 물론 휘추리채 바람에 간들간들 흔들리고 높은 시렁 위로는 머루와 다래넝쿨이 친친 감겨 올라 제물에 정자를 만들고 그 아래에 차 식탁이 놓여 휴게소를 이루었다. 잘고 마딘 잡초를 군데군데 깎아 버리고는 긴 이랑을 만들어 한 이랑에 한 가지씩 색다른 화초를 심었다. 모든 격식이 야지(野地)와는 달라서 미란은 역시 도회의 집보다는 한결 낫고 시원하다고 느끼면서 행복된 여름의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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