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성장의 길이었던 등굣길
성찰과 성장의 길이었던 등굣길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7.11.24 14:03
  • 호수 5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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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태평로에서 남산동까지

중학교 3년을 줄곧 걸어다닌 길

인근 골목마다 현대사의 흔적

 

비록 고단했으나 성찰의 시간

요즘도 그 추억 반짝이며 떠올라

세상이 너무도 바뀌어서 이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가는 길도 삭막하고 건조하기만 하다.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꽉 짜인 일과를 보내느라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위한 성찰과 성장의 경험을 가질 틈조차 없다. 등하굣길도 부모가 태워주는 자동차로 다니니 언제 둘러보며 생각하고 삶의 영역을 확장시켜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아득히 흘러간 시절, 나의 중‧고등학교 등굣길은 성찰과 성장의 길이었다. 왜냐하면 늘 오가던 그 길가에는 역사적 인물과 장소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몰랐어도 시간이 갈수록 내가 다녔던 등굣길이 예사로운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오늘은 중학교를 오가던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나는 대구의 북구 태평로 경부선 철도 너머에서 남산동 언덕까지 이후 3년을 줄곧 걸어 다녔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길 건너 동아극장 앞을 통과하면 바로 인교동으로 이어진다. 인교동 골목은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 이규환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규환 감독은 1932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흑백무성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작품으로 제국주의 침탈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영상물을 만들어 식민지 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그곳은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의 삼성상회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던 거리다. 북성로에서 서성로에 이르는 긴 구간의 그곳은 각종 철공소, 철재상, 공구상, 베어링, 선반 기계 등 온갖 철물과 관련된 업체가 즐비하게 펼쳐져 있던 곳. 언제나 쇠 깎는 소리, 긁는 소리, 자르는 소리, 비비는 소리, 두들기는 소리, 용접하는 소리 따위에다 노동자들끼리 자주 싸움질하는 소란까지 잠시라도 조용할 틈이 없던 지역이다. 대구의 지명들은 특이하다. 북성로, 서성로, 동성로, 남성로 등의 지명들을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데, 원래 대구읍성 시절에 성곽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그 성곽을 파괴 해체한 장본인이 바로 당시 대구군수를 지내던 친일매국노 박중양이다. 그는 침략의 원흉으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자처하던 자였다. 가련한 식민지백성들 앞에 항시 지팡이를 휘두르며 다녔으므로 ‘박작대기’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가 이토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측의 비밀스런 합작으로 대구읍성 파괴해체를 주도했던 것이다. 해체 때에 나온 수천 소달구지의 흙과 자갈은 성밖 서쪽지역의 저지대 상습침수지역으로 실어다 매립했다. 그곳은 성내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고여서 늘 습지를 이루었고, 미나리가 저절로 돋아서 ‘미나리깡’이라 불렀다. 바로 이곳에 대구읍성의 흙과 자갈을 쏟아 부어 매립을 했는데 그로부터 이름이 ‘자갈마당’으로 불렸다. 

시장북로 어름에는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의 집이 있었다. 당시 나의 등굣길은 이장희 시인이 다니던 산책길 코스 그대로였다. 또한 이 길은 이상화 시인이 마음 울적할 때마다 백부 댁이 있던 서성로 우현서루를 나와서 즐겨 찾아가던 앞산 밑 보리밭, 그 들판을 자주 다녀오던 바로 그 길이다. 고월과 상화가 다녔던 그 도로를 횡단해서 다시 달서천 둑길로 접어들면 좌우로 아주 힘겹게 살아가는 빈민촌이 펼쳐진다. 지붕을 짚으로 이은 초가들도 흔했다. 청라언덕 아래쪽 넓은 터에는 매우 커다란 한옥고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이 친일부호 장길상의 집이라 했다. 장길상의 맏아들 장병천은 대중문화사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여러분은 딱지본소설로 만들어진 ‘강명화전’(康明花傳)이란 작품을 혹시 아시는지? 대구 갑부의 아들 장병천은 한강에서 기생 강명화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병천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한다. 이에 장병천은 일본으로 강명화랑 함께 유학길을 떠난다. 많은 박해와 멸시, 조롱과 비판이 그들 뒤를 따라다닌다. 마침내 험난한 곡절을 이기지 못한 채 강명화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애인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가 사라진 된 장병천도 곧 뒤따라 극약을 삼키고 생을 마감한다는 슬픈 순애보. 둘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강명화전’은 세간에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한다. 

나의 중학교 시절 등굣길에는 이처럼 한국근대사의 현장으로 볼거리들이 많았다. 강물 같은 세월은 얼마나 흘러갔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니 55년 광음(光陰)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그 시절은 비록 외롭고 고단한 심신이었으나 이제 와 되짚어 보노라니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럽던 성장과 성찰의 시간이었던가. 가슴 속에 꿈도 많고 사랑도 풍성했던 그 청춘의 시간은 이제 멀고 아득한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눈물의 습기로 젖은 파릇파릇한 추억들은 내 가슴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사금파리처럼 살아나 제각기 하나씩 생기(生氣)의 빛을 머금고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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