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 그리고 파뿌리
황혼이혼 그리고 파뿌리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7.12.01 11:11
  • 호수 5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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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 남편을 처음 본 날

커다란 쌍커풀 눈이 좋았는데

요즘은 그 큰 눈이 가장 못마땅

변한 건 내 마음일 뿐이니

파뿌리 씻으며 다잡는다

지금이 대파 제철인가 보다. 시장에 갔더니 커다랗게 묶어놓고선 만원이란다. 얼렸다가 양념할 때마다 쓰면 좋겠다 싶어서 샀다. 뿌리는 잘라서 국물을 낼 때 넣으면 국물이 시원해진다. 파뿌리, 주례사의 단골메뉴인 ‘검은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의 바로 그 파뿌리다. 

맞구나. 파뿌리를 잘라서 흐르는 물에 씻다보니 윤기 없이 푸석푸석한 하얀 뿌리가 영락없이 희게 세어버린 노인 흰 머리다. 내 머리는 검은흙이 적당히 붙어 있는 파뿌리쯤 될 거다. 내년이면 결혼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살라 하던 주례 선생님이 내어준 숙제는 대충 한 셈이다.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인내심과 빨리 포기할 줄 아는 적응력의 공이 제일 클 게다. 

엊그제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평소에 말수도 적고 그저 자기 일만 묵묵히 하며 조용히 사는 친구. 오죽하면 별명이 ‘가운데 토막’이었을까. “나 이혼한다. 며칠 전 남편에게 통보하고 지금 제주도에 와 있어. 마음 정리나 하려고.”

그 부처님 가운데 토막 친구가 이혼을 한단다. 주변에 이혼한 사람이 심심치 않게 있어서 그다지 놀랄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 애가, 그것도 그 나이에, 황혼이혼을 한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정신없이 바쁜 남편에게 별 불평 없이 늘 내조 잘하고, 잘생긴 아들 하나 낳아 씩씩하게 잘 키워 좋은 학교까지 보내고, 바쁜 남편을 대신해서 시집 대소사도 열심히 챙기던 친구. 그 애가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동화책에는‘왕자님과 공주님은 그렇게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란 말로 마무리되지만 그건 전편일 뿐이다. 만약 후편을 만든다면 ‘그 후로 왕자님과 공주님은 지지고 볶고 싸우며 말들이 많았답니다’로 끝났을 것이다.

1974년 3월, 나는 남편을 처음 만났다. 쌍꺼풀 진 큼지막한 눈이 맘에 들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그 선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까지 정화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내가 좋아 했던 그 큰 눈이 지금은 제일 못 마땅하다. 처음에는 나와 다른 그 모습이 매력적이었는데, 이제는 나와 다른 그 모습이 싫다. 사실 남편도 할 말은 많을 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눈은 변함없건만 변한 건 내 마음이니 말이다.

남자가 좀 ‘샤프하고 날카로운 면’도 있어야 매력인데 이 남자는 마음의 상처만 받고 딱 끊는 맛도 없고 순해빠졌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더니 다 이유가 있는가 보다. 잘 때 이빨 가는 소리도 신혼 초에는 ‘뽀드득 뽀드득’하얀 눈 밟는 소리 같았는데 요즘은 ‘푸하 푸하’코고는 소리까지 겹쳐서 마치 무슨 공장 돌아가는 소리 같다. 가끔은 귀신 소리 같이 들리기도 해서 섬뜩하게 무서운 밤도 있다. 

거기다가 예전에는 탄탄한 체격이 듬직한 보호자 같았는데 지금은 부실해진 다리며 허리며 소심한 성격까지. 이제는 내가 보호자 같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했고, 친절한 금자씨도‘너나 잘 하세요’라고 했던가.

나름 착한 몸매에다 상큼한(?) 외모, 그리고 윤기 흐르는 머리에다 상냥한 말투까지. 그게 나였다. 적어도 예전에는. 하지만 이제는 옛 얘기다. 배는 나와서 앞모습인지 뒷모습인지 구별도 힘들고, 턱과 볼은 늘어져서 도저히 상큼하게 봐줄 수 없는 외모에다 날이 갈수록 머리는 숱도 줄고 기름기도 빠져서 도배할 때 풀 바르는 빗자루 같기만 하다. 상냥한 말투? 여기저기 쑤시는 몸에서 상냥한 말투가 나올리는 만무하다. 

부부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는 거라 했다. 둘이 원하는 방향, 즉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뜻일 게다. 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남편 뒤만 따랐던 ‘가운데 토막’ 그 친구에게도 불만은 있었고, 속에서 점점 자란 그 불만이 터져버린 것 같다. 걸핏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이쪽이다, 저쪽이다’ 싸우면서 포기할 건 포기하고 고집할 건 고집부리며 수시로 업데이트하며 살아온 나는 내 속에 불만을 키울 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에도 컴퓨터 업데이트 하듯이 업데이트가 필요한 건 아닐까. 

배우자가 아무 말 안하니 우리는 문제가 없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이라도 붙잡고 물어보자. 업데이트 안한 컴퓨터가 갑자기 블랙아웃 되는 것 많이 봤지 않는가. 파뿌리가 된 머리로 이혼 결심을 한 내 친구. 춥고 낯선 제주도에서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결혼 시작부터를 후회하고 있을까 아님 업데이트 안한 걸 후회하고 있을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황혼나이에 뒤통수 맞은 친구 남편 심정은 또 어떻고,

그나저나. 코골이가 돌연사 위험이 많다던데 내일은 남편 데리고 병원에나 가봐야겠다. 보호자나 가장 노릇이나. 서로 바꿔가며 해보는 것도 괜찮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들으며 잠든 지 어언 40년, 이제 조용하면 남편을 흔들어 깨우게 된다. 어디 아픈가 싶어서 말이다. 님아, 밤마다 침대에 누워 철강공장을 돌려도 좋으니 그 기계 멈추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만 살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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