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도 본능적으로 그의 팔에 전신을 던지고 자기의 팔에도 힘을 주었다
미란도 본능적으로 그의 팔에 전신을 던지고 자기의 팔에도 힘을 주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2.15 11:20
  • 호수 5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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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65]

꿀 냄새같이 좋은 것이 없다. 영훈은 행복감에 넘치면서,
“세상에서 지금 누가 제일 행복스러울까요.”
목소리를 높여 본다.
“제가 제일 행복스럽죠.”
수수께끼를 가장 옳게 풀어낸 듯 미란의 자신에 넘치는 대답.
“내가 제일 행복스럽다나요.”
영훈도 자기의 대답을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전 어떻게 하구요.”
“내가 제일 행복스럽다니까요.”
“아니에요 저예요.”
“십칠억 중에서 가장 행복스러운 게 나예요.”
“제가 제일예요.”
“내가 제일예요.”
“제가 제일예요.”
실랑이를 치다가 결국 마주보고 껄껄껄 웃으면서 좁은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닫는 것이다. 행복감의 표현과 사랑의 고백은 점잖은 말과 태도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요, 차라리 어린 아이같이 허물없는 태도와 오도깝스런 방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은 모르는 결에 훌륭하게 그것을 해치운 셈이다. 전화로 시작된 사랑의 말이 이날에 은연중에 열매를 맺은 것이다. 두 사람의 마음은 마지막으로 알 것을 알아낸 듯 만족스러웠다. 싸리꽃 냄새를 맡으면서 지름길을 걸어가던 그들은 사실 십칠억 중에서 첫째 둘째로 행복스러운 사람들같이 보였다.
미란의 한 가지의 걱정은 피아노의 연습을 게을리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 것은 산속에서 의외로 한 대의 피아노를 발견하게 된 까닭이다. 노비나촌 한가운데에는 극장과 무도실을 겸한 조그만 홀이 있었고 그 안에 피아노가 놓인 것을 영훈은 마을의 주인 양코스키 씨와 교섭한 결과 세를 맡기로 한 것이다. 사용료를 주고 하루에 몇 시간씩 홀에 들어가서 사용할 권리를 산 것이다. 미란의 걱정은 해소되어 영훈과 함께 날마다 홀에 다니는 것이 일과의 하나로 불었다. 악보들을 가져온 것이 다행해서 미란에게는 하루하루가 뜻있어지고 놀아도 마음이 놓이고 피서가 한층 즐거운 것으로 되어 갔다.
나무 그림자 속에 묻혀 있는 까닭에 홀 안은 낮에도 어두웠다. 교회당같이 기다란 창에서 빛이 흘러든다 해도 원체 휑한 방안은 구석에 박쥐라도 날아날 듯 어두컴컴했다. 무대 바로 아래편에 놓여 있는 피아노는 창에서 흘러드는 빛을 정면으로 받게는 되었으나 그래도 촛불이라도 켰으면 할 정도의 어둠이었다. 건반을 향해서 두어 시간 들볶다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시고 골이 띵했으나 이런 때에는 시냇물에 내려가 바람도 쏘이고 산에 올라 나무 사이를 헤치기도 했다. 하루는 어두운 홀 안에서 막 연습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밖에서 별안간 가제 들어가면 한참 동안은 눈이 어두워서 건반조차 확실히 보이지 않았으니 그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미란은 영훈의 체온을 가까이 느낀 것이었다. 번개 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횃불같이 전신을 덥게 하면서 입술이 와 닿았다. 선지피를 끼얹은 두 얼굴이 달며 두 팔이 전신을 꼭 죄었다. 바닷속에서 낙지에게나 잡힌 듯 전신의 피가 엉겨드는 듯하다. 밝은 속에서는 도저히 용기를 못 낼 그런 돌발적인 행동――애정의 표현은 벼락같이 감행하지 않고는 못하는 것일까. 어두운 것이 다행이었다. 미란도 본능적으로 그의 팔에 전신을 던지고 그의 뜻에 몸을 맡기면서 자기의 팔에도 힘을 주었다. 부끄러운 김에 캄캄한 속에서도 눈을 감고 있었던 까닭에 무더운 어둠 속에서 그 똑같은 자세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몸에 불이 붙은 채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가는 것도 같았다. 그날의 연습은 물론 틀려서 두 사람은 악보를 그대로 던져 두고 그 단 몸으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좀체 식지 않고 말을 잊은 듯이 입들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카시아나무 아래를 걸어오는 야한 색채의 옷을 입은 외국 여자가 유심히 자기들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홀 안에서의 비밀이나 알고 있는 듯 미란은 제물에 고개가 숙었다. 그를 지내놓고 별장으로 향하는 길로 나섰을 때 미란에게는 다시 부끄러움이 솟으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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