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일과가 생긴 후부터 영훈은 밤이 패이는 줄 모르고 열중하게 되었다
춤추는 일과가 생긴 후부터 영훈은 밤이 패이는 줄 모르고 열중하게 되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12.29 10:49
  • 호수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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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67]

하루는 아마도 세란의 제의였던 듯하나 춤을 추어 보자는 의론이 나자 즉석에서 찬동을 얻어 이후 밤마다 그것이 유쾌한 파적거리가 되었다. 영훈은 온천에서는 구면이 되어버린 까닭에 여관에서나 이웃집에서 레코드를 긁어 모아다가는 밤마다 제공했고 그 값으로 못 추는 춤의 교습을 받기로 되었다. 현마들 식구끼리는 허물없는 것이었고 영훈도 그 속에 한몫 끼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았으나 죽석만은 멀리 두고 온 남편의 생각도 있고 남의 가족 속에 혼자 끼어서 건들거릴 수도 없어서 처음에는 사양도 해 보았으나 세란의 고집에는 배겨내는 장사 없었고, 무엇보다도 개중에서 그는 상당히 춤이 익숙한 편이어서 남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나중에는 제 스스로 팔을 벌리고 나서게 되었다. 춤이 익숙한 것은 죽석뿐이 아니라 세란도 밑지지 않으리만큼 그 길에는 능란해서 둘이 결으면 왈츠니 탱고니 못 추는 것이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현마와 영훈이 하잘것없는 것이 섭섭하고 멋쩍었다. 벼락공부로 익혀가지고 추기 시작한 것이 기껏 트롯 정도였다. 그러나 간단한 스텝도 열중하기 시작하니 흥이 나서 레코드 한 면이 짧고 성에 안 차는 것이었다. 미란은 약간 그 방면의 소양이 있던 터에 터득이 빨라서 얼마 안 가 부드러운 스텝을 밟게 되었다. 사람이 적은 까닭에 돌려 가면서 추느라고 영훈은 세 사람과 한 번씩은 다 결어보게 되었다. 미란과는 물론 세란과도 죽석과도 손을 잡아보는 것이나 미란과의 때에는 스텝보다는 높아 가는 감정에 얽매이게 되어 발이 빗나가고 자세가 뒤틀어지기가 일쑤였다. 춤추는 일과가 생긴 후부터는 영훈은 그 어느 날이나 밤이 패이는 줄 모르고 열중하게 되어 대개는 밤이 깊어서야 온천으로 내려갔다. 밤참을 먹고 차를 달여 마시고 난 후 영훈이 온천으로 행할 때에는 미란은 따라 나와서는 밤길을 중간쯤까지나 동무해서 걸었다. 몸에는 춤에서 받은 율동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즐겁고 유쾌한 기분에 밤기운이 한 방울 한 방울 술같이 몸에 젖어들었다. 그 아름다운 날마다의 밤이 무슨 까닭에 자기의 것이 되며 그 행복이 무슨 까닭에 자기의 차지가 되는가, 행복이 있다가는 필연코 불행이 뒤를 잇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행복이 도리어 무서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불행이란 어떤 데서 오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불행한 것인가――가야의 생각이 무뜩무뜩 떠오르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야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하고 있을 것인가――이 생각은 가슴을 앙칼지게 에우는 때도 있었다.
“가야를 생각하면 괴로워서 못 견딜 때가 있어요.”
입안에 뱅 돌던 그 말을 기어코 하룻밤 입 밖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라는 이름이 영훈의 가슴속에서도 물론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안개같이 서리우면서 마음을 항상 무겁게 둘러싸고 있었던 터이다. 아픈 상처를 다칠까봐 그대로 살며시 버려둔 셈이었던 것을 그날 밤 미란이 따짝거려서 뜨끔뜨끔 쑤시기 시작하게 만든 것이었다.
“가야의 이름은 찰그마리같이 차져서 가슴속에서 씻어낼래야 씻어낼 수 없습니다만.”
“제가 가진 허물 중에서 가야에게 대한 죄두 여간 큰 것이 아닌 듯해요. 그를 낭떠러지로 밀쳐 버리구 나 혼자만이 솟아날려구 죄를 짓구 있는 것만 같아요. 변명을 해본대두 결과에 있어선 그런걸요.”
“가엾은 생각으로야 나두 일반이지만 그런 생각과는 형편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의 뜻을 짓밟아 주구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은 내나 미란씨가 아니구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 힘을 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구 있을지 가야의 그 헤트러지는 눈동자를 생각하면 뼈가 저려져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부옇게 흐려지는 그 눈! 세상에서 그보다 가엾은 게 또 있어요.”
“그러게 나두 자꾸 잊으랴구 애쓰죠.……쓸데없는 일 더 생각하지 말기로. 즐겁던 밤을 이렇게 슬프게 끝막을 까닭이 있나요.”
달려들어 급스럽게 안아 주는 바람에 미란은 간신히 서글픈 속에서 깨어나기는 했다. 영훈의 힘은 날로 벅차 가는 것이어서 그 속에 몸을 맡기고 열정의 바닷속에 잠기면서 미란은 사실 한시라도 속히 모든 것을 잊게 되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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