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 “나는 기어코 해낸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 “나는 기어코 해낸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12.29 13:06
  • 호수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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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1]

새해부터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던 인물, 이 민족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생각나는 위인들을 시리즈로 내보낸다. 집필자가 사회저명인사, 학자들인 만큼 특별히 읽을 맛을 준다. 그들의 높은 학식과 사고, 통찰을 통한 독특한 인물해석이 가능해서다. 첫 회는 국무총리를 지낸 박태준 전 포철회장(1927~2011년)이다. 집필자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송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 철강 산업의 부흥을 이끈 ‘철강왕’이 아닌 ‘선비로서의 박태준’을 조명했다. 


크레인 운전공이 졸다가 100톤의 쇳물을 쏟아 공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가 대가족의 부양을 맡아 시간외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알게된 박태준은 “이 일은 내가 책임진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한다. 너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했다.
크레인 운전공이 졸다가 100톤의 쇳물을 쏟아 공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가 대가족의 부양을 맡아 시간외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알게된 박태준은 “이 일은 내가 책임진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한다. 너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했다.

박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선비이고 가장 모범적인 선비다. 그는 개발 시대, 산업화 시대 선비의 전형이다. 일상의 생활이며 사고이며 지향이며 일체의 행동거지에서 그는 누구에게 나 지표가 되는 선비다. 젊은 날 그는 직업군인이었다. 옛날로 말하자면 무인이다. 무인과 선비는 범주가 다르고 개념이 다르다. 행위하는 바가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박태준은 어떻게 선비냐이다. 해방을 맞아 학교를 채 마지기 전에 그는 군인이 되었고 6‧25 전쟁 때는 문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적전 일보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무수히 치렀다. 골수 무인 정신으로 무장된 무인으로 전쟁을 했다. 적에 대한 적개심과 국가에 대한 순명적 조국애가 그의 무인 정신이었다.

박태준은 군복을 벗고 국영업체 사장을 할 때도 군인 지휘관처럼 했다. 그의 필생의 사업인 포스코에서도 그는 사실 군인이었다. 포스코에서 그가 놓지 않고 손에 들고 다닌 지휘봉은 군 지휘관이 갖는 그 지휘봉이었다. 포스코를 방문한 외국 회장들이 그의 지휘봉을 군 지휘봉이라고 하자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봉이라고 응수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선비란 말인가. 이유는 그의 정신이, 마음이, 성격이, 행동이, 일상의 생활이 선비였기 때문이다. 그는 의지의 선비다 그의 굳은 뜻은 순명의 차원이다. 뜻을 위해선 목숨도 얼마든지 바친다는 것이다. 선비가 뜻을 지키고 뜻을 펼치기 위해선 생명을 내건다는 것, 그것은 극한 상황에 이른다는 말이다. 

“박태준에게는 밀실이 없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은 바로 그 절대적 절망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사정이 좀 나아지긴 했어도 1970년대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극도의 자기 부정이 머리로 가슴으로 심지어는 뼈와 살 속까지 그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위 제철 보국한다는 것, 그 자체가 불가능이었다. 일본은 특히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도 미국도, IBRD(세계은행)도, KISA(대 한국제철차관단)도 하나같이 제철산업의 절대 불가능성을 주장했을 때 박태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해냅니다. 기어코 해냅니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입니다.”

그의 굳센 의지가 다른 이의 마음까지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은 일본 총리 후쿠다 다케오의 회고담에서 잘 드러난다. 후쿠다는 “나는 그의 단호함에 너무 놀랐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나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해냈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썼다.

박태준은 의의 선비다. 그의 의는 그의 투명성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행위가 투명하다는 것은 그의 행위가 떳떳하다는 것이다. 미쓰비시 상사를 일본 제일의 기업으로 만든 우쓰미 기요시 회장이 박태준에 대해서 한 말은 박태준의 의와 투명성을 보여주는 절구이다. 

“박태준에게는 밀실이 없다. 밀실이 없으니 밀실 거래도 없다. 밝고 정직하고 곧은 인격을 가진 그에게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1977년 여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돈과 노동과 시간을 들여 만든 공사가 부실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는 서슴없이 폭파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공사장은 폭파됐다. 건설 과정에 들어간 예산과 인력과 공기를 생각하면 부실 공사라 해서 그렇게 쉽게 폭파할 수가 없다. 그냥 눈감고 넘어가는 것이 통례고 그 시대 관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실공사의 결과물만을 폭파하는 것이 아니라 부실 둔감증을 폭파하는 것이고 부실 관행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부실은 부정이고 불의다. 의를 행위의 본으로 삼는 선비가 예산이며 공기를 구실로 부실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은 노사 분규의 시대, 학생 시위의 시대였다. 그런데 포항제철 공장에서는 노사 분규가 없었고 학교 포스텍(POSTECH, 포항공과대학교)에서는 학생 소요가 없었다. 레너드 홀슈 국제철강협회 사무총장은 그 이유를 소통에서 찾았다. 그는 “분규가 있었다면 그것은 박태준의 인격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서이다. 교육 이념이 훌륭하고 시설이 훌륭해도 설립자와 학생 간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으면 분규는 일어난다”고 말했다.

“절대적 사익은 없다”

박태준은 전형적인 청렴의 선비다. 가장 청렴하고 그리고 가장 결백한 선비다. 그의 청렴과 결백은 먼저 자신의 신체를 깨끗이 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는 포철 내의 다른 사람에게도 깨끗한 신체 가짐을 당부하는 결벽심의 소지자다. 

박태준의 청렴은 포철 같은 공익 조직 내에서는 무사심이라는 절대 명제를 체화하는 단초가 됐다. 그 무사심은 이익 추구라는 절대 사익의 세계에서 ‘절대적 사익은 없다’는 명제를 실현시키는 무사심이었다. 그의 청렴과 무사심이 조직 성원에로 감정이입 된 결과 조직 성원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열고 마음을 움직이고 진정으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온몸을 바쳐 일하게 된 것이다. 

조직론에서 소위 말하는 엠퍼시(empathy)상태다. 그것은 지도자의 무사심에 대한 감응이며 감화다. 일본 총리를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포스코를 방문했다가 놀라운 현상을 보고는 “어째서 부하 직원들이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그를 따르는가”라고 물었다. 헬무트 하세크 오스트리아 국립은행 총재는 이 부분에 대해 자문자답했다. 

“사심 없는 그의 지도력 때문이다. 그 같은 무사심의 지도력이 없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흔들림 없이 그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 금융계의 제1인자의 눈에는 부하 직원들의 깊은 신뢰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 신뢰가 포스코의 기적을 가져 왔다고 생각했다. 

박태준은 자애의 선비다. 1977년 4월 24일 새벽 제1제철공장에서 엎질러진 쇳물사건이 일어났다. 크레인 운전공이 100톤이나 되는 쇳물을 담은 쇳물바가지를 천정으로 올려 전기로 옮기던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만 공장 바닥에 쏟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사고로 공장의 신경계라고 할 케이블의 70%가 불에 탔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재정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 회사라면 크레인 운전공은 파면은 말할 것도 없고 검찰에 고발돼 감옥까지 가게 됐을 것이다. 

박태준은 해외에서 급거 귀국해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크레인 운전공이 혼자 힘으로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잠을 자야하는 교대시간에도 다른 일을 많이 했다는 것, 당연히 잠이 부족했다. 그것이 회장의 가슴을 울렸다. 크레인 운전공의 사표를 반려하고 그에게 더 많은 배려를 했다. 박태준은 “이 일은 내가 책임진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한다. 너는 열심히 일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회사 짓기 전 사원주택부터

포항제철의 복지 제도는 제도로서의 모범일 뿐 아니라 복지 그자체로서 모범의 실제다. 어느 해 국회에서 말썽이 빚어졌다. 야당 의원들이 “회사를 세우기도 전에 사원주택부터 짓는다는데 도대체 무슨 짓이오. 국가기간산업을 시작도 못해보고 망치자는 거요”라고 몰아쳤다.

그러자 박태준은 태연히, 아니 당당하게 대답했다. “양질의 노동력은 억지로 나오지 않습니다. 강요한다고 질 좋은 노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노동은 최고의 처우에서 나옵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박태준은 누구인가

육군사관학교 6기로 5‧16혁명에 가담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지냈다. 포항종합제철의 기반을 닦았고 10여년을 회장으로 재직하는 등 평생을 포철과 함께 했다. 11‧13‧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제3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화랑무공훈장, 독일 공로십자훈장, 프랑스국가최고훈장 레종도뇌르훈장, 세계적 철강상 윌리코프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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