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1.12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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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그림·잡지 속에 묘사된 조선의 신여성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신여성 도착하다’ 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은 삽화가 안석주(1901~1950)가 그린 ‘여성’지 창간호(왼쪽)와 ‘신여성’ 표지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신여성 도착하다’ 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은 삽화가 안석주(1901~1950)가 그린 ‘여성’지 창간호(왼쪽)와 ‘신여성’ 표지의 모습.

20세기 전후 세계적으로 등장한 ‘신여성’ 주제로 한 500여점 선봬

신체 해부도 닮은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 나상윤의 ‘누드’ 등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지난해 미국에서 방영·개봉한 영화·드라마 작품에 상을 주는 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때아닌 검은색 바람이 불었다. 1월 7일(현지시간) 개최된 시상식에서 유명 여배우들이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와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인 ‘미투’ 캠페인(Me too, “나도 당했다”는 의미로 성폭력 사례를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자는 움직임)을 지지하고 나섰다. 국내에서도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거세게 벌어지고 있다. 국내를 비롯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분위기 속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새로 선보인 전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화제의 전시는 오는 4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진행되는 ‘신여성 도착하다’ 전이다. 전시에서는 국내에서 발행된 잡지 등 각종 인쇄물과 회화·조각·자수·사진·영화 등을 통해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사회를 풍미한 신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플로리다대학 한미술관에 소장 중인 김은호의 ‘미인승무도’(1922), 일본 도쿄 조시비미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 전신골격’(1940) 등 국내 미공개작과 함께 현대작가들이 신여성을 재해석한 신작 등 500여점을 소개한다.

신여성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20세기 초 일본과 기타 아시아 국가로 넘어왔다. 신여성은 여성에게 한정됐던 사회, 정치, 제도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근대에 새롭게 나타났다. 

조선일보의 실린 안석주의 만평 ‘모-던 껄의 장신운동’
조선일보의 실린 안석주의 만평 ‘모-던 껄의 장신운동’

조선에서도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은 여성이 1890년대 이후 출현했으며, 신여성은 1910년대부터 주요 언론 매체·잡지 등에서 쓰이기 시작해 1930년대 말까지 빈번하게 사용됐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조선 여성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동서양 문화의 충돌이라는 억압과 모순의 상황을 동시에 경험했다. 서양의 신여성이 남성 권력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당시 조선 여성들은 구조선의 여성상을 벗고 근대의 이념과 문물을 추구하는 존재로 이미지가 형성됐다. 

전시는 잡지 표지·삽화, 대중가요, 영화 등에서 다뤄지거나 남성예술가들이 묘사한 ‘신여성 언파레-드’, 근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나혜석·김명순·최승희·주세죽·이난영 등 5명의 신여성과 이를 오마주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는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등 3부로 구성해 신여성의 모습을 조명한다. 

먼저 ‘신여성 언파레-드’에선 1900년대 초중반 교육받은 여성, 서구화된 외모와 사치스러운 차림새, 자유연애주의자, 살림에 대한 정보와 교양을 갖춘 현모양처 등으로 표현된 신여성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언파레-드’는 ‘on parade’를 뜻하는 1930년대식 표현으로 당시 언론엔 인물을 나열하고 그들의 신상정보·특징을 소개할 때 사용했다. 

당시 ‘신여성’, ‘부인’, ‘별건곤’, ‘만국부인’, ‘여성조선’ 등 대중잡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남성 작가들이 묘사한 탓인지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이상적 기준이 반영돼 있다. ‘신여성’ 1933년 9월호 표지인 ‘9월의 매력’은 기타를 곁에 두고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얇은 한복을 입은 채 우아한 자세로 포도를 먹는 단발머리 여성을 담고 있다. 교양과 취미를 갖고 있으면서 단아하면서도 육감적인 외모, 현대성(단발)과 전통성(한복)이 혼재된 이 이미지에선 당시 신여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시선을 볼 수 있다. 

반면 여성이 주체가 된 잡지는 달랐다. 대중문화의 선도자이면서도 하층민으로 천대받았던 기생들이 펴낸 잡지 ‘장한’(長恨, 1927년), 경성의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들의 기고문이 실린 ‘여성’(1934년) 등은 자신의 사회적 권리와 위상을 확보하려는 여성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부에선 사군자·서예작품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기생들의 작품을 비롯해 자수·공예작품, 여학교·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나혜석·이갑경·나상윤·박래현·천경자의 회화 등이 전시돼 있다. 가장 눈길 끄는 건 남편 김기창과 함께 12차례나 부부전시회를 열었던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다. 의학도들이 암기하는 해부도처럼 신체 각 부위의 각종 뼈·관절 이름이 적힌 이 작품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화폭에 담기 위해 미술학교 학생들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 잘 보여준다. 도쿄에서 유학한 나상윤의 ‘누드’역시 인상적이다. 화장한 얼굴 아래로 뱃살이 늘어지고 가슴이 쪼그라든 중년 여성을 여성의 눈으로 포착해 최근에 그려진 것처럼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다.

마지막 공간에선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을 영상으로 재해석한 ‘나쁜 피에 대한 연대기’(2017)가 볼만하다. 지난해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한 작가 김세진(47)의 작품으로 1951년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진 김명순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묶어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해 이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영상으로 부활한 김명순은 기생의 딸로 태어나 남성 동료 작가들의 공개적인 모욕을 받으며 글을 썼던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보여줘 당시 신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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