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등산 제의에 세란도 잠방이를 입고 륙색을 짊어지고 따라나섰다
하루는 등산 제의에 세란도 잠방이를 입고 륙색을 짊어지고 따라나섰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1.19 10:43
  • 호수 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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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70]

단주는 몸을 던지면서 말 이상의 설명을 몸으로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옥녀를 한층 부채질해 주는 결과가 되어서 찰거머리같이 엉겨들게 될 때 단주는 자기가 시작한 그 열정의 도가니 속에서 도리어 숨이 막히고 기가 지쳐서 낙지다리같이 휘줄그레해지고는 말았다. 세란과의 때와도 흡사했다. 저편에서 겨뤄 오는 열정이 처음에는 단술이어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차차 진해지면서 모르는 결에 흠뻑 취해 와서 기진맥진한 끝에 혼몽상태에 이르게 되는――그런 눅진한 열정을 욕심스럽게 요구하는 점에서 옥녀는 세란과 흡사했다. 조그만 몸 속 어느 구석에 그런 무진장의 열정이 숨어 있나를 의심하면서 단주는 깜빡 취해버리고야 말았다. 탁하고 혼몽한 속에서는 한 모금의 찬물을 원하게 되듯 단주에게는 으레 한 줄기의 깨끗하고 맑은 것――미란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버릇이었다. 세란과의 때에도 번번이 미란의 자태가 날카롭게 솟던 것이 이제 옥녀와의 불더미 속에서도 역시 미란의 초초한 환영이――그만이 세상에서 귀하고 신성한 것인 듯 눈부시게 떠오르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미는 것이나 환영은 손가락에 닿지 않고 깜박 꺼지고 자기의 몸만이 추접한 불더미 속에 남는다. 불더미 속이 답답해지고 구역이 치밀면서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사라진 환영을 찾고 높은 것을 구하려는 마음에 벌컥 자리를 일어서려면 옥녀의 손이 놓아주지 않는다. 옥녀를 박차고 나가서 맑은 바람을 쏘여야겠다는 의욕이 솟으면서도 눈앞의 바오리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면서 번민 속에서 헐떡거리게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같이 여겨지면서 자기가 파놓은 함정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신음하는 셈이었다.
단주가 그리워하고 꿈꾸는 미란에게는 영훈과의 맑은 사랑이 날로 덥게 피어 가는 중 푸른 집의 혼탁한 열정이 반드시 전염되었을 법은 없으나 별장에도 돌개바람같이 혼란이 오게 되었다.
음악도 시들해지고 춤들도 단조로워져서 다른 신기한 소일거리는 없나 하고 고심들하게 되어 유다른 것이 있으면 정신을 쏟게 되었다. 피서로서는 역시 도회 가까운 바닷가가 변화 많고 번화해서 낫다는 것을 깨달으며 세란은 한시를 무료히 여기게 되었다. 미란과 영훈의 무료해 하지 않는 자태들을 바라보면서 그 향기를 자기도 한몫 맡고는 싶으나 영훈은 단주와는 애초에 인금이 다른 것이요, 손가락 하나 범하는 수 없어서 아쉬운 대로 단주나 속히 왔으면 원하면서 현마와만의 단조한 풍습에 싫증이 났다. 하루는 등산의 제의가 나자 세란도 무거운 몸에 잠방이를 입고 륙색을 짊어지고 따라나섰다. 영훈까지 끼어서 일가 총출동으로 앞 개울을 건너 물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일대에는 싸리꽃이 흔해 그 꿀의 풍미가 훌륭하다는 바람에 수나 좋으면 벌집을 만나 꿀을 뺏어 오자는 것이었으나 벌은 눈에도 뜨이지 않고 험한 숲속을 헤치노라고 결국 반날의 노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을 뿐이나 날을 지우자는 것이 목적인 그들에게 그 하루의 원족으로서는 흡족한 것이었다. 유쾌한 소득이 있다면 개울가를 더듬어 내려올 때 눈에 뜨인 한 자웅의 사슴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았음이다. 깊은 골짝에서 물을 마시러 내려온 모양인 듯 반석 위에 서서 긴 목을 뽑고 유유하게 물을 마시는 알록 자웅의 광경이 속세의 것 아닌 고결한 것으로 보였다. 그 산골짝의 인상적인 그림이 가슴속에 배면서 골짝을 더듬어 내려오는 것이 미란에게는 여간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부락까지 돌아왔을 때에는 피곤한 김에 해는 길게 남았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온천으로들 내려가 목욕을 하고 이른 저녁을 먹고는 늦어서야 별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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