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음미하는 디카시 산책
간이역
갈 길이 먼
급한 마음은 서지 않는 곳
간이역에 눈이 내린다
자기부상 열차 같은 시간을 내려놓은
겨울밤이 깊어간다
조영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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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몇 시나 되었을까.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깊은 밤에 눈이 내린다. 갈 길이 멀어 한사코 급한 마음은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겠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간이역은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시간은 헛발질을 해대는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고 밤은 깊어 가는데 눈은 푹, 푹, 내려서 상념은 하릴없이 계속 쌓이고 있다.
얼마나 더 내려야 온 세상이 다 지워지고 저 초라하기 그지없는 간이역마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을 그만 포기하게 될까. 얼마나 더 포기해야 새 날 새 다짐으로 다시 첫걸음을 내딛게 될까. 쉬지 않고 걸어온 언 발을 녹일 집에 당도하면 어깨를 짓누르던 검은 시간들이 쏟아져 잠시 가벼워질까. 눈이 내리는 시간만큼 마음을 휘젓는 생각들이 어지럽게 날린다. 깊은 겨울, 눈 오는 밤.
글=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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