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마는 여자들 자태를 바라볼 때 눈이 흔들거리면서 까빡 취했음을 깨달았다
현마는 여자들 자태를 바라볼 때 눈이 흔들거리면서 까빡 취했음을 깨달았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1.26 10:54
  • 호수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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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72]

피곤은 했어도 긴 날이어서 초저녁부터 침실로 들어가기도 멋쩍은 판에 객실에 불을 켜 놓고 이곳저곳에 앉아 소설책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다 각각 몇 권씩의 소설책들을 지니고 왔던 것이 다행이어서 산속에서는 영훈이 날마다 온천에서 갖다 주는 신문과 함께 오락물의 하나가 되었다. 평소에 책읽기를 싫어하고 잔 한 줄 한 줄을 어떻게 꼼꼼스럽게 읽어 가노 하고 글과는 담을 쌓고 있던 세란이나 죽석도 별수 없이 무료한 속에서는 그 한 줄 한 줄을 꼼꼼스럽게 읽을 수밖에는 없었다. 기껏 가지고 왔다는 소설들이 「데카메론」이니 모파상의 장편소설이니 슈니츨러의 단편들이니 하는 것들이어서 그런 소설들을 차례로 읽으면서 세란은 자기 비위에 맞는 대문만을 이해하고 감동하면 그만이었다.
그날은 무슨 책들을 논아 쥐었던지 번히 서로들 아는 책이면서도 진진한 대문을 읽을 때에는 일종의 비밀을 느끼면서 자기만이 그것을 알고 있는 듯 숨은 기쁨을 입속에 가만히들 감추었다. 현마가 읽고 있었던 것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번역이었다. ‘방앗간 집’의 요절을 할 이야기에 눈초리의 주름을 잡으면서 술잔으로 한 모금 한 모금 목을 축이고 있노라니 세란과 미란이 뛰어와서 조롱을 하면서 위스키의 병을 번갈아 빼앗아서는 한 잔씩들 기울이는 것이다. 술을 먹는 버릇도 별장에 와서 익힌 것인데 심심한 판에 맛보게 된 것이 이제 와서는 제법 쓸쓸할 때의 술 먹는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석의 허물인지도 모르기는 하다. 떠날 때에 가게에서 순수한 외국치라고 자랑삼아 포도주니 큐라소니 진이니 위스키니를 여러 병씩 짐 속에 넣었던 것이다. 현마 혼자로서는 그 많은 것을 다 제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옆에서 거들기 시작한 것이 먹게 된 시초였고 현마는 양코스키의 아들 왈리엘 군과 어느 결엔지 친하게 되어 위스키 병이나 들고 가면 보드카를 몇 병이든지 바꾸어 올 수 있어서 별장에는 술만은 삘 새가 없었다. 세란과 미란이 현마에게 매달려 술들을 뺏는 것을 보고 죽석도 식성이 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어서 슬그머니 일어나서 포도주 한 병을 들고 나온다. 여자들 비위에는 그것이 맞는다는 듯이 세란과 미란은 즉시 그리로 몰려가서 세 사람이 한패가 되어서 현마와 대거리나 하는 듯 불란서에서 왔다는 떫은 포도주를 벌떡벌떡 켜는 동안에 접시 위에 햄을 베어 놓고 치즈를 저며 놓고 완전히 술추렴이 되고 말았다. 피곤한 판에 자옥하게 저물어가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한 잔 두 잔 기울이는 것이 제법 홍취가 도도해지면서 도회에서 맛보지 못하던 홍취를 숨은 산속이기 때문에 맛볼 수 있게 되었음을 행복스럽게 여기는 동안에 흠뻑들 취해 갔다. 어른 앞에서 못하던 장난들을 어른이 없는 새에 숨어서 살며시들 해보는 아이들의 놀음과도 같은 것이 여자들의 술타령인지도 모른다. 읽던 책들도 던져 버리고 수군덕수군덕 이야기들을 하다가 거나한 김에 축음기를 틀어놓고 춤을 추다가는 흔들거린다 쓰러진다 하는 것이었다. 현마도 혼자서 조금씩 머금을 때에는 모르던 것이 눈앞에 어릿거리는 여자들의 자태를 바라볼 때 눈이 흔들거리면서 까빡 취했음을 깨달았다. 건들건들 춤추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전신이 휘뚱휘뚱 기울어지면서 들고 있는 책의 활자가 요술같이 커졌다 작아졌다 해 갔다. 미란이 와서 책을 차버리고는 손목을 끄는 바람에 허전허전 일어서서 그 숲에 한몫 끼이게 되었다. 미란은 유쾌한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서 영훈을 끌고도 오고 싶었으나 취한 꼴로 밤길은 위태할 것 같아서 내일도 날이거니 하고 섭섭한 생각을 억제할 수밖에는 없었다. 춤이 아니라 쓰러지고 붙들고 난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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