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지렁이
  • 글=이기영 시인
  • 승인 2018.02.02 13:21
  • 호수 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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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음미하는 디카시 산책

지렁이

온기를 쫓아 기어든 말랑말랑한 몸들이

그 온기에 말라 왜곡되면서

콘크리트 층층의 행간에 문장을 남겼다

생의 출구를 향해 머리와 허리가 그은 획을

빛과 바람이 완독하리라

최석균(시인)

**

생의 출구인 줄 알고 온기를 쫓아 나왔다가 그 온기에 말라 죽어갈 줄 몰랐을까. 땡볕에 그대로 말라버린 몸이 콘크리트 행간에 유언처럼 남겨졌다. 감히 누가 저 문장을 읽을 수 있으리. 오직 눈부신 빛과 바람만이 완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이 키우고 자연이 거두어가는 저 순리 앞에 한낱 미물의 존재지만 엄숙한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작은 생명체에 대한 존재의 의미가, 혹은 가장 낮은 곳에서 천대받는 존재의 비의가 읽힌다.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존재는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하지 않던가. 

    징그럽고 하찮은 지렁이지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 속에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엄이 담겨 있다. 하물며 사람에게야 어찌 그 존엄을 따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없는 사람 살아가기는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에 온기가 필요한 시기다.    

    글=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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