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들은 좀 더 참지를 못하나
왜 남자들은 좀 더 참지를 못하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2.09 11:32
  • 호수 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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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검사, 여류시인, 여배우들이 성희롱·폭행·추행을 당한 얘기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유독 검찰과 문단, 연예계에 불미스런 일이 다반사인 게 납득이 안 간다.

기자들의 세계는 다르다. 수십 년 기자생활을 해오면서 술자리에서 평기자들끼리, 또는 선배가 후배 여기자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조만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여기자’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자의 기억 속에는 없다.  

과거에는 강간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렸다. 그때는 성추행이란 단어조차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순수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도 속으로만 끙끙 앓거나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것으로 족했다. 여자가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멀찌감치 물러났다. 일방적·강압적 밀착 시도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여성을 존중하고 신성시(?)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사랑방 손님’이나 ‘소나기’같은 서정적인 명작들이 나올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어머니, 누나, 여동생 외에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연인에 근접하는 사이면서도 손을 잡지 못한 채 몇 달을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헤어지곤 했다. 연애의 진도를 보면 남녀가 손을 잡는 계기는 뜻하지 않던 외부의 모멘텀에 의해 어부지리로 얻어지는 ‘횡재’였다. 만약 손을 잡았다면 그 순간 두 사람은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속성반’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키스는 말할 것도 없다. 만약 키스를 했다면 그건 곧 결혼을 의미했다. “저 남자와 키스도 했단 말이니”란 말은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저 남자와 잤니” 정도가 될 것이다. 일부 남자들은 여자와 키스했다는 사실을 전쟁 무용담처럼 떠벌일 정도였으니까. 적군이 던진 수류탄을 백드롭 킥으로 되받아쳐 상대 진지에 떨어트려 수십 명을 사살했다는 수준이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시대인지라 사석에서 여성을 강제로 추행하거나 말로 성적인 수치심을 주는 일은 드물었다. 강도가 집안에 침입했다가 들켰을 때 입막음으로 겁탈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선. 그런데 요즘은 왜 그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는가. 

여러 가지 이유 중 생리적 분출구를 찾지 못해서도 하나가 될 것이다. 오래 전에는 길만 나서면 어디서든 욕정을 풀 수 있었다. 다방에서, 영화관에서, 술집에서, 방석집에서, 요정에서, 집창촌에서…. 그런 곳에선 뒤탈이 없었다. 접대부가 ‘추행 당했다’고 했다면 웃음거리만 됐을 테니까. 요즘은 노래방이나 룸살롱 정도가 남았을까. 그래서인지 노래방에서 수위 높은 행위들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남자들의 성은 화산처럼 열려 있다. 전후 일본의 전설적인 작가 이시하라 신타로의 아쿠타카와 수상작품 ‘태양의 계절’에는 남자의 발기한 성기로 문풍지를 뚫는 장면이 나온다. 수컷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 중 하나이다. 여기엔 어떠한 인격도, 교양도, 사회적 지위나 체면도 족탈불급이다. 

존경 받는 노벨상 후보작가가 젊은 후배 문인들을 상습적으로 추행하고 대학 강단에 서는 덕망 있는 소설가가 ‘너는 몇 번째 00’라고 말하는 것이 모두 남성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이다. 남자는 한순간에 신세를 망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방아쇠’를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니 방아쇠를 당기지 않도록 좀 더 인내하고 자제하고 억제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남자들은 손을 뻗치기 전에, 입으로 내뱉기 전에, ‘돋보기 눈’이 돼 신체 한 부위를 집중 응시하기 전에 평생을 쌓아온 경력과 명성, 재물을 소중히 되돌아보는 인고의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투 여기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건 남자 기자들의 인내력이 ‘타이어 고무’처럼 질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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