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은 밖으로 나가자 어둠 속을 쏜살같이 내달으며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미란은 밖으로 나가자 어둠 속을 쏜살같이 내달으며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2.23 10:43
  • 호수 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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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74]

“어떻게 하면 미란이 맘이 시원할꾸.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쓰러져 보일까. 내 손으로 내 몸을 죽여 보일까. 소원이라면 내 무엇이든지 하지.”
미란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현마는 처녀의 고집에 겁이 났다.
“야밤중에 어디루. 이 어둡구 늦은데.”
따라 나갔으나 미란은 밖으로 나가자 놓인 말같이 어둠 속을 쏜살같이 내달으며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미란. 미란이……”
부르면서 몇 걸음 따라 내려가도 헛일이어서 미란의 자태는 볼 동안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미란. 미란이……”
목소리조차 없다. 야밤중이라고는 해도 그 주제로 뒤를 쫓는 것이 수상하고 우스울 것 같았고 미란의 달아나는 방향이 온천 쪽임을 안 까닭에 영훈에게로 가는 것임이 틀림없을 듯해서 현마는 그대로 발을 돌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내 진 죄가 그렇게두 큰가. 무슨 벌이든지 달게 받을 테다. 무슨 벌이든지…….”
그것을 원할 때에는 그 원만이 세상에서 가장 바르고 떳떳하고 귀한 것인 줄 알았던 것이 지금 와 보면 그 귀한 원이라는 것이 별것 아닌 자기 한 사람의 욕심이었던 것을 안 것이다. 남의 뜻을 뺏고 희생해서 손에 넣게 되었을 때 그것은 벌써 원이 아니고 죄였다. 그 허물을 덜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빌고 싶은 마음조차 솟았다.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주저앉았을 때 던져진 소설책들이며 쓰러진 술병들이며 까막잡기를 한 뒤의 어지러운 모양이 밝아가는 현마의 눈에는 여러 해 전에 지나간 옛일의 장면같이 먼 것으로 어리우면서 무거운 생각이 가슴속에 꽉 차고 들어앉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별장에서는 북새가 일어났다. 간밤 까막잡기 이후의 일을 모르는 세란과 죽석에게는 미란의 자태가 안보임이 수상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산보를 나간 것이면 얼마 안가 돌아오려니만 짐작한 것이 아침이 훨씬 넘었고 아무리 영훈에게는 놀러간다고 해도 때를 빠진 일은 없었는데 하고 근심을 할 때 현마도 겉으로는 시침을 떼고 있으나 걱정되지 않는 바 아니어서 스적스적 온천으로 내려가 보았다. 놀란 것은 온천에도 미란의 자태가 없는 것이다. 영훈은 현마의 설명을 듣고 걱정을 하면서 근처의 수풀 속과 개울가를 찾아보나 종시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 길로 별장으로들 올라왔을 때 미란이 돌아왔을 리는 없었고 별장 안은 발끈 뒤집혔던 것이다.
미란은 간밤 무서운 절망 속에서 영훈을 찾재도 마음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관에 밤중에 투숙할 수도 없어서 겁도 잊어버리고 시오리나 되는 밤길을 역까지 걸어 나갔다. 걷는 동안에 눈물도 말라 버려서 처음에는 캄캄하던 마음속에 차차 영훈의 자태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내내 마음을 위로하고 채워 주는 것이었다. 막차 시간을 대어서 서울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 줄을 꿈에도 알 리가 없어서 현마들은 혹시 철없는 짓이나 저지르지 않았을까 하고 종일토록 산속과 물속을 헤매이다가 저녁때는 되었을 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현마는 미란을 찾아 한 걸음 먼저 고향으로 가기로 했다. 단주에게 전보를 쳐서 자기와 교대로 떠나도록 분부해 놓고 역으로 향해 저녁차로 떠난 것이었다.
단주는 전보를 칭탁해서 옥녀를 간신히 떼 놓고 구미양행과 만태와 함께 후반기의 늦은 피서를 떠나게 되어 역시 그날 밤차를 탔다. 그런 까닭에 이들 일행과 현마와는 타고 있는 차 속에서 길이 어긋나서 남북으로 각각 다른 목적들을 품고 모르는 속에서 어깨들을 스치고 지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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