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재즈가수였던 배우 복혜숙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배우 복혜숙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2.23 10:55
  • 호수 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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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부친의 반대 무릅쓰고

연극·영화배우에 이어

재즈가수로도 활약

꿈 위해 결단 감행한 복혜숙은

한국영화사의 개척자로 우뚝

한국의 대중문화사 초창기에 활동했던 분들은 대개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적어도 두 세 개 이상의 장르에 참가했던 경력들이 보입니다. 연극배우가 영화에 자연스럽게 출연했었고, 또 배우 출신 가수로서 음반제작에 동원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복혜숙(卜惠淑, 1904∼1982)에 관한 내용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녀의 활동영역은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지요. 그녀는 개척기 한국근대영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았던 대중문화계의 선구자였습니다. 

복혜숙이 배우가 된 과정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1904년 충남 보령에서 기독교 전도사의 딸로 태어난 복혜숙은 어머니가 남편의 전도사업 때문에 오해를 받고 체포돼 옥중에서 고생할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고생을 겪던 끝에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지어준 아명은 복마리(卜馬利)입니다. 이후 그녀는 서울 이화학당을 다녔는데 재학 중에는 수예과목이 좋았습니다. 이 취향은 마침내 일본유학으로 이어지게 됐지요. 이것이 복혜숙의 첫 번째 탈출입니다. 하지만 복혜숙은 일본에서 새로 익힌 수예작품을 팔아 그 돈으로 영화관만 줄곧 다녔습니다.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배우의 길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가장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무용에 심취하게 됐는데 고국에서 딸을 찾아온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고 격노해서 강제로 귀국시켰습니다. 이후 부친은 강원도 어느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게 됐고, 혜숙은 그곳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궁벽한 산골생활의 단조롭고 무료한 리듬이 싫어진 복혜숙은 어느 날 몰래 짐을 챙겨 서울로 달아납니다. 이것이 복혜숙의 두 번째 탈출입니다. 서울의 극장 단성사를 찾아가 인기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속 포부를 털어놓습니다. 김덕경은 그녀를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에게 소개를 시켰고, 거기서 복혜숙은 신파극에 출연하는 배우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생활이 곤궁해지자 다시 집으로 돌아가 부친에게 앞으론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무대 활동의 유혹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중국의 따롄 항으로 도망치듯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복혜숙의 세 번째 탈출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연락해둔 아버지의 신고로 현지경찰에게 붙들려 조선으로 즉시 압송됐습니다. 1921년으로 접어들자 복혜숙은 현철(玄哲, 1891∼1965)의 조선배우학교를 찾아가 입학했습니다. 이것이 복혜숙의 네 번째 탈출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배우가 되고 싶은 딸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더 이상 가로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1926년은 복혜숙이 영화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감독 이규설 감독의 영화 ‘농중조(籠中鳥)’에서 복혜숙은 배우로서 첫 출연을 합니다. 이 ‘농중조’는 일본말로 ‘가고노도리(かごのとり)’, 즉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뜻입니다. 복혜숙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만약 그녀가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 고분고분하게 ‘농중조’, 즉 순종적 삶으로 살아갔다면 이후 배우로서의 삶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끼를 억제하지 못해 여러 차례 가출을 하지만 완고한 부친에 의해 다시 끌려 돌아옵니다. 하지만 복혜숙은 기어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친의 뜻을 거역하고 과감한 일탈을 계속 감행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선각자 복혜숙의 결연했던 판단과 과감한 선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복혜숙의 가요음반 ‘그대 그립다’와 ‘종로행진곡’을 발매했습니다. 이어서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음반의 종류 가운데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롭습니다. 이 음반을 통해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대중음악사에서 복혜숙은 사실상 최초의 재즈가수였다는 것입니다.

새벽녘이 되어 오면 이내 번민 끝이 없네/ 산란해진 마음 속에 비취는 것 뉘 그림자
그대 그립다 입술은 타는구나/ 눈물은 흘러서 오늘밤도 새어가네(재즈 ‘그대 그립다’ 1절)

1962년 영화계의 원로가 된 복혜숙은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위원장직에 선출돼 무려 10년 동안 한국영화발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일평생 300여 편이 훨씬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영화사의 개척자 복혜숙! 그녀가 배우로서 출연했던 마지막 작품은 1973년 ‘서울의 연가’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복혜숙의 나이 고희(古稀)가 되던 그해에 방송인, 영화인들은 정성을 모아서 조촐한 칠순잔치를 차려줬습니다. 복혜숙은 말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후배들이 차려준 이날의 잔치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1982년 배우 복혜숙은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이승에서의 장엄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2013년 12월, 복혜숙의 고향 충남 보령시에는 ‘보령문화의 전당’이 건립 개관되었습니다. 이곳은 보령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온갖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전당 앞마당에는 보령이 낳은 위대한 대중예술인 복혜숙 여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지역을 찾는 나그네들은 꼭 복혜숙 동상을 찾아가서 그녀의 발을 정겹게 쓰다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장엄하고도 신산했던 삶, 가슴 속에 간직한 내밀한 꿈을 반드시 성취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여사의 선구적(先驅的) 발자취를 이렇게 더듬어 추억해보는 것도 무척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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