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는 영훈을 바라볼 때 ‘저 녀석이야말로 모든 일의 화근이 아니던가’ 원망
단주는 영훈을 바라볼 때 ‘저 녀석이야말로 모든 일의 화근이 아니던가’ 원망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3.09 11:07
  • 호수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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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란의 열정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서 단주는 무더운 정염에 둘러싸이고 있을 때에는 일신의 뼈끝에서 푸른 불꽃이 날리는 듯한 피로감이 나고 문득 독약 냄새를 코끝에 맡은 것 같은 착각이 생겼다. 옥녀에게서도 같은 것을 느끼던 판에 이번의 피서는 일종의 도피행인 것이었으나 세란에게서 또다시 전날의 연속을 당하고 날 때 생각나는 것은 미란뿐이었다. 이번 걸음도 미란을 만나자는 것이 큰 목적이던 것이 와 보니 그의 자태는 어디론지 빠져 버렸던 것이다. 세란들의 불충분한 설명으로는 그가 대체 집으로 간 것인지 어쩐지 조차도 추측할 수 없어서 도리어 근심을 산 셈으로 날마다 생각나는 것이 그였다. 그렇다고 세란의 체면 앞에서는 오던 길로 다시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우울한 시간이 많았다. 수선스런 별장안의 공기를 떠나서는 홀로 길을 거닐고 개울가에 나가는 때가 늘었다.
미란에게 대해서 같은 회포를 가지고 역시 홀로 온천 길을 거닐고 바람을 쏘이려 개울가에 나가는 것이 영훈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어디로 별안간 종적을 감춘 것인가. 
하기는 별장의 공기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고 병든 데가 있어서 모르는 결에 자기도 눈썹을 찌푸리는 때가 있었던 것이요, 도대체 그 집안 식구들의 기풍이 밖에서는 엿볼 수 없는 그 무슨 숨은 그림자와 으늑한 그늘을 감추고 있기는 했으나 미란의 일신상에 대체 어떤 불측한 일이 있었기에 나에게까지 말이 없이 사라진단 말인가, 언제인가 일신상의 상처를 암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에우는지를 말한 일이 있었으니 아무리 그에게 상처가 있단들 전신이 피투성이라고 한들 내 마음이야 변함이 있을 것인가, 왜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인가――곰곰이 생각하면서 회포는 진(盡)하지를 않았다. 음악에 대한 생각도 요새 와서는 미란보다 지위가 떨어져 작곡의 계획도 흐지부지 헤트러지기가 일쑤였다. 사랑이 없을 때 ‘아름다운 것’의 노래도 나오지를 않으며 개울물 소리를 들어도 나뭇잎 나부끼는 소리를 들어도 악보 위에 적어야 할 아름다운 감흥이 솟지를 않는다. 넓은 반석 위에서 단주를 만나면 그 야릇한 집안의 한 식구인 그의 꼴이 불유쾌한 것으로 보이면서 번번이 머릿속이 혼란해 갔다. 내가 모르는 비밀을 도리어 저 녀석이 알고 있지나 않을까, 나를 돌려 놓고 저 녀석도 그 비밀 속에 한몫 참가해 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미란에게 대해서 나보다 한층 위에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이 생길 때에는 견딜 수 없이 몸이 수물거리면서 한동안 행복스럽던 것이 왜 금시에 이렇게 불행하게 된 것인가, 행복이라는 건 비늘구름같이 왜 그리 속히 꺼지는 것인가, 복잡한 괴롬이 솟으면서 마음이 어지러워 갔다.
그런 의혹을 품고 있음은 단주도 일반이다. 가까워 오는 영훈을 바라볼 때 저 녀석이야말로 모든 일의 화근이 아니던가, 이번의 미란의 실종에도 속에 숨어서 계책을 꾸미고 농간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피아노를 가르치러 온 때부터 미란의 마음을 한꺼번에 뺏어간 것이요, 그 후부터 미란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떠나고 저 녀석이 들어앉게 된 것이다. 비록 미란의 처녀지에 첫발자국을 낸 것은 나라고 해도 미란이 그것을 뉘우치고 있음을 알 때 내 사랑은 여지없이 부서져 버렸다. 마음의 굴복이 첫째지 토지의 점령은 뜻 없는 일이다. 나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진짜 행복을 차지 한 것은 저 녀석인 것이다. 나 없는 동안에 이 깊은 산속에서 둘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저 녀석은 모든 것을 뺏어간 엉뚱한 침입자요, 도적이 아닌가. 결혼이니 무어니 단말로 나를 꼬이고 달래더니 집안 사람들도 요새는 까딱 그런 소리도 없이 나는 완전히 빼돌리고 말았다. 차라리 언제든가 그 첫 봄날 미란과 함께 도망을 쳤던들 일이 이렇게는 되지 않고 좀 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을 그만 실책을 했던 까닭에 이렇게 빗나가고 뒤틀리고 헛물을 켜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록에 원통하고 애닯고…….――하는 생각이 들며 영훈의 자태가 세상에서도 원망스러운 것으로 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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