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은 무서운 예감이 들고 겁이 벌컥 나면서 가야의 편지를 떨어트렸다
미란은 무서운 예감이 들고 겁이 벌컥 나면서 가야의 편지를 떨어트렸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3.30 13:28
  • 호수 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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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79]

영훈의 방에서 마치 그 방의 주인인 것처럼 잠자고 일어나고 영훈만을 생각하고 지내는 미란에게는 참회의 수녀 같은 기쁨이 있었으나, 한편 그 기쁨의 반주를 하는 슬픔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슬픔은 가야가 보내는 것이었다. 기괴한 인연을 맺게 된 가야는 언제든지 그의 뒤를 따르고 슬픈 그림자를 던져 준다. 음악실에서 북새가 있은 후로는 까딱 자태가 눈에 안 뜨이고 못 보아 온 지는 오래였으나 그 자태 대신에 혼은 날마다 연구소를 찾아온다. 방문을 잠가 놓아도 영훈에게로 오는 편지 속에 날개를 싣고 날아드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미란이 방안을 정리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노라면 문틈으로 배달부가 전하는 한 장의 편지가 삐죽이 들어와서는 마루에 떨어진다. 영훈에게로 오는 가야의 글씨임을 알 때 그대로 덮어두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아서 기어코 헤쳐 보면 일상 하던 격식으로 한 장 종이 위에 슬픈 노래가 적혀 있곤 했다.

마음 덮이고 
괴롬 더하면 
때도 잊고 
여위어 가다.

전에 그가 부르던 같은 노래의 계속이다. 참으로 지금쯤은 얼마나 여위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갔다.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그 하루가 전부 가야의 생각으로 채워져서 날이 맞도록 울가망한 것을 날이 새면 또 다른 편지가 숨어드는 것이다.

이 내 몸 
부질없이 
먼 하늘 헤매이다 
불리는 잎새같이 
날리고 
또 날려서 
한없이 병들어 가다.

가야의 눈이 떠오른다. 여위고 병들어 바람결에 날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왜 그와 알게 되었던고, 왜 하필 영훈을 싸고 그와 맞서게 되었던고――기구한 인연이 원망스럽다. 가야는 남을 한하는 법도 없고 무턱대고 영훈에게 대해 마음껏의 정성을 보이고 있을 뿐인 것이 더욱 괴롭고 견딜 수 없다. 자기를 미워하고 저주해 주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악한 것보다도 착한 것 앞에서는 마음이 괴롭고 두려운 것인 듯하다.

이 괴롬 면하고 
진(盡)할 날 언제리 
슬픈 노래 남기고 
진할 날 언제리.

이 노래를 읽는 날 미란은 무서운 예감이 들고 겁이 벌컥 나면서 편지를 떨어트렸다. 마지막 노래나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흘렀던 것이다. 수많은 노래를 불러오다가 마지막 노래에 이른 듯――그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그 이전의 수많은 노래를 불러온 것인 듯――느껴진다. 가야의 일이 아니고 바로 자기의 일인 것만 같아서 그 하루는 그 생각으로만 그득 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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