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이 눈앞에 미란을 볼 때 여러 가지 질문은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영훈이 눈앞에 미란을 볼 때 여러 가지 질문은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4.06 13:35
  • 호수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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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80]

짜장 이튿날부터 가야의 편지는 끊어져 버렸다. 미란은 이제는 오히려 그 슬픈 노래를 더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침이면 단정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조바심을 하면서 문께를 바라보는 것이나 편지는 종시 안 오는 것이다. 슬픈 위에 슬픈 것을 기다리는 마음――슬픈 노래 더 안 오는 것이 미란에게는 도리어 불행이었던 것이다. 만약 가야에게 마지막의 불행이 있다고 하면 자기도 그 속에 한몫 참가해 온 셈이 되지 않는가――그의 슬픔의 원인이 되고 그의 불행을 한몫 거들어준 셈이 되지 않는가――자기가 없었다면 가야의 비극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결정은 되지는 않았을 것이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이런 반성과 번민이 솟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독 무슨 특권이 있건대 한 사람의 인격을 물리치고 그에게 불행을 주게 되었는가, 가야보다 낫고 그를 이길 무엇이 자기에게 있는가, 재주인가, 마음인가, 육체인가, 영훈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 그토록 간절한 가야의 순정이 자기에게 떨어질 법은 없는 것이며 그러면 육체――이것을 생각 할 때 눈앞이 캄캄하며 괴로워 갔다. 육체로 말하더라도 자기가 가야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이 순결하고 맑은 점에 있어서 겹겹으로 허물을 입은 자기는 그 앞에 낯도 쳐들지 못할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 무엇 하나 가야보다 나은 것은 없다. 자기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사랑이라는 것은 목욕재계하고 맑은 마음으로 제단 앞에서 드리는 제사와도 같이 경건한 것이어야 할 때 허물없는 자랑과 영광으로 그 제사를 드릴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 것일까. 영훈의 사랑을 받고 그를 사랑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 것일까. 영훈은 가야의 것이어야 한다. 가야의 사랑을 받고 가야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그렇게 호락호락 눈으로부터만 드는 것이라면 무슨 값이 있는 것인가. 영훈의 상대로는 가야만이 참으로 만 사람 중에서 선택된 단 한 사람의 자격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 옳은 길을 모르는 영훈을 뙤어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요, 슬픈 가야를 위해서 보여 주어야 할 정성이 아닌가――이렇게 생각해 올 때 미란에게는 비장한 감격이 솟고 높은 정신이 싹트기 시작하며 그날 하루는 또 그 생각으로 날이 맟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같이 수월하고 여러 갈래인 것은 없다.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요, 반드시 행동의 동반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미란은 그런 희생의 정신 이상으로 영훈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괴롬 속에서 돌연히 영훈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미란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의 애정 속에 머리를 묻었던 것이다. 단주와 싸운 이튿날로 영훈은 온천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의외에도 자기 방을 차지하고 있는 미란을 발견했을 때 그 역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전보다 곱절의 애정이 솟음을 억제하는 수는 없었다.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질문과 불만과 문책을 준비하지 않은 바도 아니었으나 눈앞에 미란을 볼 때 그런 것은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요, 사모의 정만이 솟았다. 참으로 미란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며 그 정을 거역 없이 받아들이는 미란의 태도에서 그 역 자기를 사랑함을 깨달으면서 두 사람은 그 순간 전까지의 생각은 고스란히 잊어버린 것이었다. 영훈을 가야에게 맡기고 자기 한 몸은 빠지려고 생각하던 미란의 궁리가 종적 없이 사라진 것도 물론 모르는 동안에 욕심이 마음속에 서리서리 서리어서 반성을 덮어버리고 희생의 정신을 막아 버리고 있음을 자기 자신인들 어찌 알았으랴. 영훈이 책상 위의 가야의 편지를 발견하고 한 장 두 장 펴보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야가 다시 커다란 제목으로 떠오른다.
“가야에게 무슨 일이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어요.”
영훈은 마지막 노래를 눈으로 훑고 나서는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본다.
“설마――.”
“처녀의 맘이 안 그래요……. 가장 수월한 것인지두 몰라요.”
“내 죄란 말요?”
영훈은 괴롭다 못해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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