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우리 ‘또’ 한 번 잘 살아 보세
[기고]우리 ‘또’ 한 번 잘 살아 보세
  • 차석규 수필가
  • 승인 2018.04.06 13:44
  • 호수 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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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온 나라가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될까를 고민했다. 경북 청도군 신도리마을의 김봉영이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제 때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한문을 가르치는 선비 즉, 훈도였지만 자식을 서울로 유학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전쟁을 겪은 후 황폐화된 서울을 목격한 김봉영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재건될 지 고민에 빠졌다. 그가 내린 결론은 농촌이 잘 살아야 도시가 번성한다는 것이었다. 고민을 끝낸 그의 발걸음은 재빨랐다. 그길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인 이인후와 박종태를 찾았다.

“우리 셋이 힘을 합쳐 잘 사는 마을로 바꿔보자.” 3인방은 의기투합했고 동네 청소, 꽃길 가꾸기, 샘 청소 등 쉬운 일부터 시작했다. 신도리마을은 노는 사람, 술독에 빠진 사람,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무(無)의 마을로 유명했다. 일찍이 근면성실이 몸에 배어 있는 주민들은 3인방의 행보에 동참한다. 

마을이 깨끗해지자 다음으로 한 일은 지붕 고치기였다. 당시 농촌에선 매년 초가지붕을 수선해야 했다. 이 시기가 되면 농사를 짓지 못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도리마을 사람들은 낡은 초가지붕을 버리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슬레이트로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196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을 돌며 국조 개조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 기차가 청도에 이르렀고 그의 눈에 신도리마을의 슬레이트 지붕이 들어왔다. 기차를 멈추고 마을을 답사한 박 대통령은 깜짝 놀란다. 꽃길을 걸으며 새 단장을 한 우물, 넒어진 농토를 보면서 무릎을 치며 감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국민들은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가지면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았고 이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속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더 나아가 새마을운동은 지구촌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현재는 어떨까.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를 부르던 청년들의 입에선 ‘헬조선’, ‘흙수저’라는 비관적인 단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튀어나온다. 나라는 부유해졌지만 청년들의 마음은 가난해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낮은 임금, 비정규직 문제 등 청년들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부정적인 생각에선 벗어났으면 한다. 새마을운동의 핵심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에 있다. 나도 너도 아닌 ‘우리도’ 잘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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