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고민에서 해방된 즐거움
선택의 고민에서 해방된 즐거움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8.04.13 11:23
  • 호수 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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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할 권리가 많을수록

이리할까 저리할까 고민하다

시간만 낭비하기 일쑤

고를 필요 없이 주어질 때

고마움 느껴지고 신기해

끝나지 않는 전쟁인 다이어트. 나는 이 살과의 전쟁을 평생 동안 치르고 있다.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그랬나. 추위를 대비해서 내 몸이 척척 알아서 비축했었던지 2킬로그램이나 늘었다. 부피로 따지자면 두부 2킬로그램을 사서 내 몸 구석구석 붙여 놨다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안되겠다. 오랜만에 헬스센터라도 가야지. 큰맘 먹고 운전대를 잡아 서울 한복판에 있는 종로헬스장으로 향했다. 

와우~. 차창 밖 풍경은 며칠 사이에 흑백 풍경에서 총천연색 칼라로 바뀌어 버렸네. 예쁘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하얀 꽃까지. 며칠 전 북한에서 했던 남북평화협력기원 예술단 공연이름이 ‘봄이 온다’였던가. 말 탓인가 보다.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봄도 같이 왔다.

꽃구경 하며 오다보니 어느새 헬스장 빌딩 주차장. 서울 한복판이라서 그런지 올 때마다 자리 값을 하느라 늘 부족하다. 그런데 아니! 주차공간이 ‘널널’하다. 이게 웬 떡? 일단 첫 번째로 눈에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나오려다 보니 군데군데 빈 공간이 눈에 띈다. 거기가 내가 세운 공간보다 훨씬 더 넓어 보인다.

다시 시동을 걸고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은 큰 기둥이 있어서 차를 세우고 나오기가 만만치 않다. 이것도 불어난 내 살 탓인가. 다시 차를 타고 엘리베이터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니 이곳은 차선을 지키지 않고 주차한 차 때문에 내 차 흠집 만들기 십상이다.

결국 맨 처음 세웠던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는 요가 클래스로 향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닌 탓에 한 시간짜리 요가 클래스에 20분이나 늦었다. 주차장이 붐볐던 예전에는 딱 한 번에 주차가 끝났었는데 이번엔 자리 고르느라 30분이나 걸렸다.

하긴. 전철에서도 난 이런 짓 곧잘 한다. 붐비는 전철에 딱하나 남은 자리는 잘도 차지하면서도 앉을 공간이 많을 때는 여기 앉을까 저기 앉을까 고민하다가 남들에게 다 자리 뺐기고 내내 서서 가기 일쑤다.

이건 다 내게 주어진 너무 많은 선택권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많을수록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마켓 시식코너도 열 가지 종류보다 서너 종류를 준비해 시식시키는 편이 더 많이 판다더라.

나이 먹으니 편해진 것이 하나 있다. 매사 고를 필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이 학교를 갈까 저 학교를 갈까, 전공은 이걸로 아님 저걸로, 결혼은 누구랑? 주거지는? 아이는 몇을? 살아온 순간순간마다 내 앞에는 많은 선택권이 있었다. 여기 갈까 저기 갈까 아니면 차라리 돌아갈까.

하지만 나이드니 이제는 그런 고민에서 해방된 것 같다. 낯설고 거친 것을 도전하게 만드는 무모한 용기도 줄었고, 철인 경기를 할 수 있는 체력도 아니니 요가 같은 운동이 딱이고, 제아무리 세계 각국 음식이 맛있다 해도 내 몸엔 신토불이 된장찌개가 딱이다.

이제 고를 필요가 없다. 내 몸에 ‘딱 맞는 음식, 운동, 내 집, 내 남편, 내 하는 일’이 최고다. 내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알아서 주어지는 선택권이 그저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백세시대’ 신문이 이제 12살이 되었다 한다. 12살에 초경을 하면서 어른이 되는 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드디어 우리 신문도 어른이 되었구나. 12라는 숫자 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12진법도 있고, 12지간도 있고, 12제자를 거느린 예수님이 만든 기적의 음식을 먹고 남은 것도 12광주리였고, 이순신도 ‘제게는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의 바로 그 12척의 배로 대승을 거두었고, 시계에 그려진 숫자도 12이다. 열둘은 바로 완벽함의 상징이다. 우리 ‘백세시대’도 계속 힘없는 약자의 입이 되어주는 든든한 신문으로 살아남기를 고대해 본다. 

그나저나. 쓸데없이 주차공간이 너무 많아서 놓쳐버린 내 요가 수업은 어쩌나. 운동용 자전거라도 슬슬 타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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