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장례식은 열지 말라…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내 장례식은 열지 말라…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4.13 13:58
  • 호수 6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일본 극작가의 죽음 준비

일본의 세계적인 극작가 하시다 스가코(93)가 자신이 바라는 죽음에 대해 쓴 책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가 화제다. 1925년 대한민국 경성에서 태어난 하시다는 9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여자대학교 국어과를 졸업했다. 첫 여성 각본가로 영화사에 입사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오싱이라는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드라마 ‘오싱’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하시다가 바라는 나다운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나는 매년 종합검진을 받는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해놓고는 

모순이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은 제대로 살고 싶다. 

죽기 전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존엄성이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죽고 싶다. 유언장은 나이 여든이 되었을 때 이미 써놓았다. 변호사가 “선생님은 육친이 한 명도 없어서 미리 유언장을 써놓지 않으면 재산이 전부 국가에 귀속돼 버립니다”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유언장에는 “모든 유산을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하시다문화재단에 기증한다”라고만 적었고 고쳐 쓸 생각이 없다. 

유언장 작성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여든 아홉부터 이른바 임종대비활동을 시작했다. 막상 시작해보니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먼저 모아두었던 물건을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지금까지 써온 드라마 원고와 방송된 비디오테이프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시다문화재단에서는 내가 죽으면 하시다스가코기념관을 만들어 거기에 전시하겠다고 한다. 나는 “아이고, 그걸 보러 이런 산속까지 찾아올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하지만….

해외여행 가서 찍은 사진도 산더미인데 나는 버려도 상관없지만 재단이 전시한다고 해서 버리지 않고 정리만 해놓았다. 책은 대부분 시립도서관에 기증했다. 각본을 쓸 때 자료로 쓰던 신문기사 스크랩은 모두 폐기했다. 

벽장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받아만 놓고 사용하지 않은 핸드백이 120개나 나와서 깜짝 놀랐다. 재활용가게에 가져갔더니 40만엔 넘게 값을 쳐줘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편지나 팩스 받은 용지들도 모두 폐기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던 일기도 아흔 살이 되었을 때 그만 뒀다. 더는 글씨를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연하장 정도만 쓰고 있다. 전쟁을 경험한 우리 세대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남겨둔다. 그래서 정리하는 일이 몇배로 힘들었다. 무려 2년이 걸렸고 큰 상자를 열 개도 넘게 버렸다. 그러니 정리정돈은 체력이 충분할 때 미리 해두시라.

하시다 스가코가 극본을 쓴 드라마 ‘오싱’이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사진은 영화 ‘오싱’의 한 장면.
하시다 스가코가 극본을 쓴 드라마 ‘오싱’이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사진은 영화 ‘오싱’의 한 장면.

장례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젊었을 때부터 나는 죽었을 때 장례식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결혼식에 가기도 싫어하지만 장례식에 가기도 싫어한다. 일본여자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장례식은 번거롭고 낡은 계급 제도의 상징으로 치부했다. 화족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호화로웠다. 가족 말고는 두세 명만 찾아오는 쓸쓸한 장례식도 가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장례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왜 이런 차별화된 상징 같은 행위를 하는 걸까” 생각하게 됐다. 

애초에 세상을 뜬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데 다들 무엇을 위해 모이는 걸까. “이 장례식에 가면 아무개와 아무개를 만날 수 있으니 가볼까” 하고 이해타산을 따져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도 가봤다. 물론 자식이나 친척이 많으면 장례식은 그들을 위한 행사이다.  

내 무덤은 이미 아버지의 고향인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에 만들어놓았다. 28년 전에 죽은 남편의 무덤은 시즈오카에 있으니 또 한 번 이별하는 셈이다. 마마보이였던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는데 이 묘소에는 남편의 부모님과 아주버님 부부도 함께 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아주버님은 내게 “미안하지만 제수씨는 우리 묘에 들어올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고마울 수가”하고 기뻐하면서 이유 따윈 묻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어머니 문제로 꽤나 고생했기 때문에 죽어서도 함께 사는 것은 이쪽도 사양이다.

나는 “장례식도 추도회도 열지 마세요. 그리고 죽더라도 절대 알리지 마세요”하고 유언장에 명기해놓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부탁해놓았다. 그래서 “그 사람 요즘 안보이던데,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어, 죽었네?”, 바로 이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다.

나는 이제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빵 한 덩이를 얻으려고 죽어라 일하던 시절이 있었고 마침내 평생의 직업을 찾았다. 내 인생이 정말 행복했다고도 불행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관이야 각자 다르니 내가 “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누군가는 “저렇게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기에 큰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각본 의뢰가 들어오더라도 더는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매년 종합검진을 받는다. CT라든가, 위내시경 검사라든가, PET 검사 등을 받고 매달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도 꼬박꼬박 받는다. 혈당치와 종양표지자 등을 검사하는 것이다. 병원에도 자주 가고 강압제를 비롯해 혈당이나 콜레스테롤 낮추는 약 등을 매일 열 종류를 넘게 먹고 있다. 끊고 싶지만 약 덕분에 수치가 정상 범위를 유지하고 있어서 끊을 수가 없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해놓고는 모순이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분명 검사를 받거나 약을 먹는 것은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살고 싶다. 죽기 전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존엄성이다.

식사 때는 매일 고기를 200g씩 먹는다. 의사가 “나이가 들면 근육이 약해지니까 최대한 고기를 많이 드셔서 근육을 만드셔야 합니다. 근육이 붙지 않는 음식만 드시면 점점 걷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흡수되지 않더라도 고기를 드세요. 건강의 근원은 근육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일 그만한 양의 고기를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예전에는 집근처의 호텔 수영장에 수영하러 갔다. 매일 아침 1000m를 헤엄치는 것이 30년간 지속한 일과였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기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몸을 펴주기 위해 주로 배영으로 한 시간 정도 천천히 헤엄쳤다. 

팔굽혀펴기는 일주일에 사흘을 받는 트레이닝 때 한다. 매회 한 시간씩 체조와 스쾃을 하거나 공을 사용한 스트레칭을 하는데 꽤 힘들지만 좋은 운동이다. 집에서는 에어로빅을 하거나 밸런스볼에 앉는 운동을 한다. 밸런스볼은 그저 앉아서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내 생각을 권할 생각은 없다

지금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대형여객선 ‘아스카Ⅱ’를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일본 일주나 아시아 일주를 할 때도 있고 세계일주도 세 번이나 했다. 남극에도 두 번을 다녀왔다. 평소에 사치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쓸 때는 아낌없이 쓴다. 내가 일해서 번 돈이니까. 자식을 위해 돈을 남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식도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없는 짓이다. 부모가 허리띠를 졸라매서까지 저축을 해 남긴 돈과 부동산이 오히려 자녀를 망친 예를 수없이 봐왔다. 무엇하나 되돌려주지 않는다. 노후에 자신을 돌봐주는 대가로 자식에게 돈을 남기려는 사람도 있을 텐데 두 세대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던 내 지인처럼 배신당하고 쓸쓸하게 살다 갈 뿐이다. 차라리 자신을 간병해줄 사람을 고용하는 편이 낫다.  

크루즈 여행도 가면 좋고 안 가도 그만이다. 집착하지 않는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갈 뿐이다. 배를 타는 이유는 인간관찰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참 보기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이듬 해에는 아내 혼자 와서 물어보니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바다에 뼛가루를 뿌려주려 왔다고 해서 모두가 포옹해주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뼛가루를 뿌려줬다. 그런데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미니스커트에 화려한 옷을 입고 성형수술도 해서 예뻐진 얼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 깜짝 놀랐다.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혼자가 된 사람은 정말 명랑해진다.

이제 아무런 후회도 없고 언제 죽어도 좋다. 하지만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싶지도 않다. 두렵다. 의사 선생님에게서 “이 주사를 맞으면 죽게 됩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겁이 난다. “이제 전 끝인가요? 언제 죽나요? 아, 이 주사를 맞으면 죽는군요” 하며 현실을 깨닫더라도 의사 선생님에게 직접 “곧 죽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주사인지 모르게 놓아줬으면 좋겠다. 치사하지만 나는 겁쟁이라 어쩔 수 없다.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권할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다. 나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를 원할 뿐, “나랏돈으로 병원에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 안락사를 선택합시다”라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시당초 ‘이 이상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심정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런 생각을 요구 받은 적도 없으며 주변 사람이나 사회 역시 절대 이런 입장을 강요해선 안된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