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에서 단주와 싸웠다”는 영훈의 말에 미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온천에서 단주와 싸웠다”는 영훈의 말에 미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4.20 10:49
  • 호수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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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81]

“죄라면 차라리 제 죄죠.”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뒤를 잇는다.
“말씀 드리려구 벼르던 것이나 제겐 아무리 생각해두 가야를 희생시킬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제비를 잘못들 뽑았죠. 전신에 상처와 흠집투성이구 세상에서두 누추하구 부끄러워서 말 못하구 속이구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
“그만두라니까.”
영훈이 막아 버리는 김에 말을 멈추어 버렸다.
“아무 말이나 하면 다 말인 줄 알구.”
자리를 벌떡 일어서면서 책망하는 어조이다.
“속이긴 무얼 속이구 누굴 속인다구 속히울 사람이 어디 있다구. 누군 몰라서 가만 있구 입이 없어서 가만있는 줄 아나. 쓸데없는 건 말할 필요가 없구 캐낼 필요가 없으니 가만있는 것이지.”
“아니――”
영훈의 말에 놀라서 미란도 덩달아 자리를 일어서면서,
“――아신단 말예요. 대체 무얼 아신단 말예요. 절 어떻게 생각하신단 말예요. 말씀해 주세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조바심이 되고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른다.
“그렇게 쓸데없는 말은 싫다니까. 말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있구 진실이라는 것은 야릇한 것이어서 밝히는 것이 필요는 하면서두 무서운 때가 있거든.”
사실 야릇한 것이 진실인 듯하다. 미란은 영훈에게서 모든 것을 들으려고 원은 하면서도 한편 공포에 마음이 죄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떨리면서도 그래도 그 진실이 부질없이 듣고 싶은 것이다. 조르는 아이같이 영훈의 팔에 매어 달렸다.
“시원스럽게 말씀해 주세요.――제일을 모두 아신단 말씀예요.”
“결론을 먼저 말하지.――무엇을 알았든 간에 내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
팔을 붙들어서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막아서서 그의 얼굴을 징긋이 노린다.
“――온천에서 단주와 싸워 버렸어.”
그 한마디의 반응이 미란의 얼굴에는 햇빛보다도 빨리 나타났다. 뜨끔하면서 얼굴이 달라지고 표정이 그림자같이 미묘하게 변했다.
“――단주나 현마나 다 같은 놈들이야. 애초부터 그 집안 공기를 탁하구 불결하다구 느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혼란 그 계책――그러나 차라리 모든 것을 알아버린 것이 내 스스로의 맘을 시험해 본 셈도 되어 내게는 다행하다구 생각돼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으려구 한 것이 조르는 바람에…….”
미란은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떨기 시작한다. 두어 마디 느끼다가 기어코 터져 버린다. 목소리를 놓고 아이같이 우는 것이다.
“무거운 감정 죄다 털어버리구 불결한 집안을 벗어나와 버리면 그만 아니오.”
“살아선 무엇하겠어요.”
미란은 겨우 고개를 들듯이 하다가 도로 숙여 버린다.
“공연한 소리를 자꾸.”
“저 때문에 길을 헤매시는 것만 같아요.”
“귀찮게만 굴면 요번에는 내가 됩데 화를 낼 테야…….”
그러는 두 사람 앞에 별안간 나타난 것이 뜻밖에 가야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가야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자기들만의 사정으로 정신이 없을 때 그들의 주의를 끌려는 듯이 바람결같이 방안으로 불어들었다. 미란은 울고불고 속 태우던 좁은 자기의 세상에서 눈을 뜨면서 어지러운 자기의 꼴을 돌아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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