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재를 따라서 병원으로 달렸을 때 가야는 막 운명하려는 것이었다
갑재를 따라서 병원으로 달렸을 때 가야는 막 운명하려는 것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4.27 16:50
  • 호수 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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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82]

낮이 훨씬 넘은 때였다.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후리후리한 사나이를 두 사람은 찬찬히 바라보다가 겨우 갑재임을 알았다. 창 기슭에서 영훈과 싸우던 그 럭비선수, 그의 머리를 미란이 화병으로 때려눕히던 가야의 약혼자 갑재를 알아내는 데 왜 그렇게 한참 동안의 시간이 걸렸던지 모른다. 확실히 두 사람은 자기들의 일만에 정신을 뽑히우고 있었던 것이다. 싸우러 나타났을 것이 아닌 갑재는 성큼성큼 걸어 들더니 전날의 그 버릇 그 표정으로 두 사람 앞에 막아서는 것이었다.
“다시는 안 올려구 했던 것이 또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을 생각하면 내 자신 가소로워서 못 견디겠으나 문을 연 순간 느낀 것이 세상에서 가야같이 불쌍한 여자는 없다는 것이네.”
“가야니 무어니 또 시부렁거리러 왔나.”
영훈이 정색할 때 갑재는 빈중빈중 입술을 휘면서 말을 똑바로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시부렁거릴 필요두 없거니와 자넨 벌써 싸움의 대상이 못되는 것이며 나와 싸울 자격이 없어. 자네들 꼴을 보구 안심했다느니보다 자네를 멸시하기로 했네. 불쌍한 것이 가야야. 가야는 세상에서두 제일 무성의한 사내를 골라선 생각하구 사모하느라구 아까운 반생을 바친 거야. 자네 따위는 열두 번 죽었다 나두 가야의 사랑에 값가지는 못하리.”
“어쩌자는 수작인가 어렇게 장황하게.”
“첨에는 가야를 원망두 했으나 지금 와 보면 가야같이 장한 여자는 없어. 마지막까지두 애를 쓰구 목소리를 놓아서 부르던 그 알뜰한 사내가 자네임을 생각할 때 자네같이 무도한 사내는 없구 가야같이 불쌍한 여자는 없단 말이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야를 존경하구 자네를 미워하구 싶네.”
“가야가 어쨌기에――.”
영훈은 뜨끔해지면서 금시 목소리가 황당해졌다.
“마지막 정경을 보면 자네게두 눈물이 있으리.”
“마지막이라니 가야가――.”
영훈은 외치면서 어느 때까지 는적을 부리는 갑재의 태도가 밉살스러웠다.
“병원에 누워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라네. 아침에 약을 먹구 신음하면서 자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굴욕을 무릅쓰구 왔을까.”
“어쩌나.”
미란은 어쩔 줄을 모르고 무의미하게 그 자리를 설설 헤매이다가 겨우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갑재를 따라서 병원으로 달렸을 때 간신히 마지막 순간을 대었다. 병실에는 집안사람들이 모여들 있는 속에서 가야는 막 운명하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펀쩍일 뿐 무표정하고 심상들한 것은 눈앞의 죽음이 감동들을 빼앗아 버린 까닭인 듯하다. 가야는 눈앞을 와 막는 영훈의 그림자로 눈을 뜨고 입을 벙긋거리고 팔을 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딴 세상으로 발을 옮겨 놓는 마지막 발디딤이었다. 느끼고만들 있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방안은 요란해졌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미란에게는 슬픔보다도 그 순간 겁이 버쩍 솟으면서 그 어지러운 속에 더 있기가 거북스러워서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버렸다. 소파에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방안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비로소 눈물이 솟으며 가야가 죽었다는 뜻이 확적히 깨달아졌다. 가야는 벌써 자기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다시 슬픈 노래를 적어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며 죽음의 뜻이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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