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의 불행한 운명
판문점의 불행한 운명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4.27 18:32
  • 호수 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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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판문점을 1983년에 가본 경험이 있다. 공군 출신인 기자는 군 복무 시절 판문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대신 경기도 성남시 고등동 공군성남기지(K16) 비행장 활주로를 지켰다. ‘서울공항’으로 알려진 그 비행장이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 군용비행장의 활주로에는 베트남전에서 활약하던 UH-1 헬기와 훈련용 프로펠러 비행기만 드문드문 있었다. 반면 이웃한 미육군항공여단의 활주로에는 온갖 종류의 전투기와 수송기, 헬리콥터, 경비행기가 날개를 맞닿은 채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공군 ‘비엑스’(육군의 피엑스에 해당)에서 몇백원하던 맥주 캔을 비우면서 두 국가 간의 파워가 비교돼 절망과 탄식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기자는 당시 ‘팀 스피리트’ 훈련 취재 차 판문점을 가게 됐다. 기자 신분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판문점에 들어가기까지 까다로운 절차가 따랐다. 미군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 미군부대의 한국인 문관이 서류작성을 도와주었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야 미군버스에 태워져 택배물품처럼 조심스럽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판문점은 쓸쓸하다 못해 황량했다. 1953년 10월에 지은 조립식건물 세 채만 덩그마니 들어서 있었다. 남쪽에는 ‘자유의 집’이, 북쪽에는 ‘판문각’이 있었지만 당시엔 판문각이 오히려 크고 세련된 건축물로 보였다. 이번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평화의 집’은 당시엔 없었다. ‘평화의 집’은 1989년 12월에 준공됐다. 
6·25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은 51년 7월 10일, 북한의 개성 북쪽 내봉장에서 처음 열렸다. 개성에서 열리던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시작된 건 그해 10월부터였다. 변변한 건물이 없는 콩밭에 군용 천막을 치고 회담을 했다. 판문점(板門店)이란 이름도 회담에 참가한 중공군이 널문리 주막을 중국식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났다.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MDL) 북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급조한 목조건물 ‘평화의 전당’에서 열렸다.   
판문점 조립식건물 세 채는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T1),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 군정위 소회의실(T3)이다. T는 ‘temporary’(임시)의 약자다. 임시 건물이란 뜻이다. 건물을 세울 때만 하더라도 누구도 정전이 65년을 넘어 계속될지 몰랐다는 흔적이다. 
세 건물의 가운데로 검은 줄이 그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홈이 파여져 있다. 군사분계선이다. 선을 넘으면 총 맞는다고 안내를 맡았던 문관의 설명에 “설마, 총을 쏘랴”하면서도 감히 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대신 조립식건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허용됐다. 되도록 북쪽으로 가까이 가서 창문을 통해 안을 살폈다. 중앙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먼지 하나 없는 테이블 위로 역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줄을 가운데 두고 태극기, 인공기, 성조기, 마이크가 양옆으로 놓여 있었다. 따가운 햇빛이 테이블과 의자에 기하학적 그림자를 그려놓았다. 
텅 빈 공간이었지만 생소한 이질감과 함께 장난스런 느낌이 들었다. 남북의 수많은 주민들이 형체 없는 이데올로기 분쟁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남북의 군대가 원한과 증오에 가득 찬 채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자의 입에선 “이 무슨 해괴한 장난질인가”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올해 4월까지 진행된 남북회담은 657회에 달한다. 그 중 판문점에서 열린 회담은 362회이다. 서울·평양과 스위스 로잔 등 국내외 다른 장소에서 남북이 마주 앉은 적은 있지만 남북회담 절반 이상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그래서 판문점은 남북 관계의 상징이자 역사다. 
판문점에서는 일어난 일들 중 국민에게 알려진 건 거의 없다. 한 번은 회담 중 북한 대표가 혼절해 실려나간 적도 있다. 2005년 7월 20일, 남북 장성급 회담 개최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협상에서였다. 당시 우리 측 대표가 “차기 회담에 대한 일정 없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갈 수 없다”고 압박하자 유영철 인민무력부 대좌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라며 흥분하다 갑자기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남측 군의관이 와서 응급처치 후 앰뷸런스에 실려 나갔다. 그밖에도 몸싸움과 고성 등이 자주 연출되기도 했다. 
30여년 전 판문점을 찾았을 때만 해도 남북의 정상이 ‘평화의 집’에서 만날 줄 몰랐다.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어떤 모습이든 협상이 이루어져 남북의 대치가 끝날 걸로 믿었다. 또 다시 30년 이상 이어져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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