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을 따라 4월의 별이 된 최은희 씨
신상옥 감독을 따라 4월의 별이 된 최은희 씨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4.30 09:29
  • 호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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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향’, ‘사랑방 손님…’ 등 남긴 불멸의 여배우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최고 히트작 ‘성춘향’ 속 한 장면. 1961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8만명을 동원했다.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최고 히트작 ‘성춘향’ 속 한 장면. 1961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8만명을 동원했다.

1953년 ‘코리아’ 이후 80여편 함께한 단짝… 이혼‧재결합 풍파

70년대 후반 납북 후에도 ‘소금’ 등 촬영… 최씨, 직접 연출도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장례식장에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부탁했어요.”

2015년 7월, 김지미, 엄앵란 등과 함께 원조 트로이카로 불리며 대한민국을 주름잡았던 한 원로 여배우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했고 일주일에 3회 신장투석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꿈이 있었다. 남편 신상옥(1926~2006) 감독의 기념관을 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끝내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한 채 타계한 배우 최은희 씨 이야기다.

최은희 씨가 향년 92세를 일기로 4월 16일 타계한 후 그의 극적인 삶이 재조명 받고 있다. 4월 11일이 기일었던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이어간 결혼 생활과 납북과 탈북 등 화려하면서도 신산했던 삶은 마치 영화처럼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오랜 잔향으로 남아 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영화 촬영 중 다정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80여편의 영화를 합작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영화 촬영 중 다정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80여편의 영화를 합작했다.

1926년생인 최은희는 열여덟의 나이에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그는 단아한 외모로 단번에 이목을 끌었다. 특히 최은희는 1953년 ‘코리아’에 출연 후 신상옥 감독과 결혼을 하면서 그가 연출하는 대부분의 영화에 등장해 콤비로 활약했다. 단순히 부부가 아닌, 작품 활동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지옥화’, ‘자매의 화원’, ‘그여자의 죄가 아니다’, ‘동심초’ 등 다수의 작품을 남기며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최은희는 한국의 고전미를 대변하는 배우가 됐으며, 신상옥 역시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두 사람이 합작해 1961년 선보인 ‘성춘향’은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같은 시기 개봉해 큰 화제를 모았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당시 성춘향은 서울 개봉관에서만 38만 명을 동원했는데 이는 현재 1000만 영화에 비견되는 수치다. 이를 바탕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이 1960년대 영화계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2)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주요섭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은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담아낸 동시에 이면에 담긴 봉건적 윤리를 비판적으로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젊은 과부 역을 맡은 최은희는 전통 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 연기 영역을 넓혔다. 또 신상옥은 전통과 새로운 여성상의 충돌을 어린 옥희의 눈을 통해 담담하게 포착해 냈고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1963년 두 사람은 경영난을 겪던 안양 영화촬영소를 아예 인수하고 1966년 한국 최초의 메이저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해 1970년대 말까지 이곳에서 80여 편에 이르는 영화를 만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현재 배우의 산실이 된 안양예술고등학교 역시 두 사람이 만든 안양예술학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 영화 발전에 디딤돌이 된 두 사람은 1977년 이혼을 하면서 모진 풍파에 시달리게 된다. 이듬해 1월 최은희 씨가 홍콩에서 납북되면서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접한 신 감독은 일본과 프랑스 등을 돌며 전처를 직접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마저도 8월 일본에서 잠적됐다는 소식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결국 그 역시 7월 이미 납북된 사실이 알려졌다. 두 사람의 납북 사실은 1984년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북한에서도 두 사람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밀사’, ‘소금’과 ‘탈출기’ 등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특히 최은희 씨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6년 극적으로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는 신상옥·최은희 부부.
1986년 극적으로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는 신상옥·최은희 부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1986년 3월 독일 베를린 국제영화제 참석을 기회로 파리를 거쳐 오스트리아에서 일본 교토통신 기자 등과 함께 빈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출했다. 두 사람의 납북과 탈출 과정은 2016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 자세히 담겨 있다. 

이후에도 영화계를 위해 헌신한 신상옥 감독은 1994년 제47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며 정점을 찍었다. 한국 영화인으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이 된 신 감독은 심사위원장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과 함께 레드카펫을 밟았다.

최은희 씨는 1965년 ‘민며느리’ 등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한 여성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로 연출과 연기의 1인 2역을 해내며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72년 10월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스카이라운지에서 결혼하는 후배 연출가 이장호 감독의 결혼식에 한국 최초의 여성 주례로 나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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