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의 생명빵
세대의 생명빵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 교수
  • 승인 2018.05.04 10:57
  • 호수 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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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묵은 빵이라도

계란 입히고 설탕 뿌려 살리면

근사한 브런치 빵이 되듯

노인끼리 대접하고 지켜주면

모든 세대가 반기는 생명빵 될 것

청국장은 구수하다. 잘 자란 콩을 푹 삶아 쟁반에 펼쳐 따뜻한 곳에 슬쩍 가리개를 덮어 놓고 이삼일 기다리면 짚이 없어도 끈적한 실이 엉기는 청국장이 된다. 냄새는 당연히 군내가 난다. 그래도 그맛에 그 냄새에 먹는다. 익다못해 죽이 될 지경인 묵은지도 그렇다. 김장을 할 때야 이 배추가 다시 밭으로 가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시퍼런 김칫잎도 겨울이 지나고 한두해 더 계절 맛을 보면 이내 뭉그러지듯 뚝뚝 끊기는 묵은지가 된다. 독에서 꺼내어 먹는 사람이야 모르지만 묵은지독에서는 늘 군내가 하나가득이다. 이게 김치찌개나 되면 사라질까 김치 군내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묵은지는 인기가 좋다.

묵은 빵은 어떤가? 묵힌 김치와 청국장의 군내가 값을 받는다면, 빵의 묵은내는 그야말로 똥값이다. 빵집에서 당일 미처 다 팔지 못한 빵은 말그대로 땡처리다. 심지어 그 다음날 이른아침 끼니를 거른 손님들을 위해 어제 남은 빵을 팔 때에도 주인장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하다. 어제의 빵과 오늘의 빵은 그 냄새와 질감, 그리고 그 기분마저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주인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은 묵은지일까, 청국장일까, 묵은 빵일까? 묵은지나 청국장이야 젊은이들도 후루룩 거리며 먹는 식사 아이템일지언정, 묵은 빵은 소화력과 비위 좋은 젊은이들도 영 별로다. 그럼 묵은 빵은 누구 입으로 들어가나?

 묵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걸 알고 있지만 묵은 빵은 판매하는 봉지마다 쭈글거린다. 누군가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은 흔적들이 가득하고, 선택될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선택받지 못한 이 빵의 운명은 매장 구석 떨이코너다. 빵이 입이 있다면 이리 말하겠다. 이런 청국장! 이런 묵은지!

욕이야 말자 싶지만, 어느새 시간은 우리를 땡처리 코너로 데려가고 구석에 수북이 쌓인 묵은 빵봉지나, 그 빵을 싼 맛에 집는 노인의 손이나 쭈글거리긴 매일반이다. 우리는 어느새 구석, 그 가고 싶지 않았던 코너에 가 있게 된 걸까. 숱한 빵 중에 묵은 빵을 집어드는 것은 오랜 절약 습관이라기보다는 수중에 지갑두께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코너에 쌓여 있는 묵은 빵 마저도 들었다놨다를 반복했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빵집을 빈손으로 나섰을 더 많은 노인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이 빵봉지를 들고 카운터로 가는 우리는 좀 나은 편일 것이다. 

그러나 묵은 빵이라고 다 같은 신세겠는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그냥 입에 꾸겨넣는 메마른 밀가루제품이겠으나,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묵은 빵은 다시 작품으로 살아난다. 

묵은 빵봉지를 풀어 빵의 알몸을 쏙 꺼내고 나서는 자르고 다듬어 계란을 입히고, 설탕을 뿌리고, 기름을 두르고 살살 돌려가며 구워내면 천상천하 유일한 브런치가 완성된다. 큼직한 접시에 차와 함께 내면 그야말로 폼나는 브런치다. 

우아하게 한 상 차려내면 어린 손주나, 새침한 며느리나, 무관심했던 남편도 달려들어 서로의 순서를 노린다. 모두를 위한 유니버설 식탁이 마련된 셈이다. 

노인들은 묵은 빵 같다. 사실 생산시장 떨이코너에 있는 것이 사실이고, 없는 이들도 선택을 주저하는 빵신세가 맞다. 그러나 기억하자, 묵어도 빵이다! 아직 먹을 만한 빵이다. 누가 이 빵을 어떻게 새로이 정련해 괜찮은 삶의 접시에 올려놓기만 한다면 세대가 탐내는 빵이다. 

묵은 빵을 집어드는 노인의 손이 묵은 것을 새것으로 만들고 모두의 소망으로 만들어내듯, 노인은 노인이 대접하자. 서로를 선택해주고, 돌봐주고,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주고, 서로를 작품으로 만들어주자. 그래야 손주도, 며느리도, 사위도, 아들과 딸도, 그리고 늙을 준비를 하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소망하는 생명빵이 된다. 

옛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이제 서로가 생명빵이 되도록 나이들어가는 이들이 서로를 지키자. 채 세련되지 못하다 해도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격려를 아끼지 말고, 기꺼이 함께 하자. 

그렇게 생명빵은 묵은내와 구겨진 봉지에서 시작하여 세대의 입과 몸을 통과하며 성장과 감사라는 세포분열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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