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보다 하얼빈을 고른 것은 그곳에 음악의 명인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동경보다 하얼빈을 고른 것은 그곳에 음악의 명인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5.11 13:11
  • 호수 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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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84]

방안에는 몇 짝의 커다란 트렁크와 피아노와 그 위에 몇 장의 악보가 남았을 뿐으로 되었다. 주위는 단순해지고 생각은 한 가지 방향으로 쏠려서 그처럼 몸이 거뿐할 데는 없다. 헌출한 방안에 두 사람이 마주앉으면 어지럽고 복잡하던 혼돈한 세계에서 두 몸만이 솟아서 편안한 세상에 이른 것도 같은 가벼운 심사가 들면서 지나간 가지가지의 일이 꿈결같이만 생각되었다.
“동경서 피아노 때문에 싸우던 일 생각나세요.”
“먼 옛날 일만 같구려.”
“봄이 가구 여름이 갔으니 옛날두 옛날이죠. 그때 싸우던 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람의 일 하나나 알 수 있소.”
여행의 계획 속에 적힌 첫 번의 중요한 도회는 하얼빈이었다. 동경보다 하얼빈을 고른 것은 그곳에 음악의 명인들이 많고 구라파 음악의 전통이 알뜰히 살아 있다는 까닭이었다. 거기서 수법의 교정을 받고 기술을 닦아서 수업을 쌓아 가지고 구라파로 떠나자는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계획이 섰을 때 벌써 좀 있으면 떠나게 될 여행의 기쁨에 가슴들이 술렁거리면서 거리를 걸어도 자랑스럽고 하늘을 우러러보면 꿈의 무늬가 아롱거렸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아래층 투어리스트 뷰로에서 사무원들을 앞에 놓고 어느 때까지나 속달질이었다. 책상 위에는 두터운 유리 아래로 넓은 세계지도가 깔려 있어서 미란은 시름없이 그것을 들여다보며 철도를 타고 도회에서 도회를 더듬으면서 가슴속에 꿈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유리 속에는 미란의 얼굴과 철을 갈아입은 짙은 색 저고리가 비치어서 그 자기 자태에 황홀해지며 세계가 자기의 차지인양 목소리를 높여서 행복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흰 얼굴에 푸른 양복을 입고 신수가 멀끔한 젊은 사무원은 체험에서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얻어들은 지식인지 세계여행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헤쳐 보이면서 수많은 도회에 대한 인상을 간명하게 일러주었다. 하얼빈에 관한 것은 거짓말이 아닌 듯해서 장황하게 늘어놓는 속에는 실감이 흘러 있었다.
“……한창 지금이겠습니다. 여름이 끝나구 막 가을을 잡아들려구 할 때가 제일 좋은 때죠. 송화강 수영의 시절이 끝날 무렵 강에는 늦은 패들이 있을 뿐 그 많던 남녀들이 이번에는 거리로 쓸려 나오기 시작해서 시절의 복색들을 갈아입으면 거리는 꽃밭같이 찬란들 하죠. 나뭇잎이 물드는 것두 여기보다는 빨라서 가로수가 사람들 본을 받는 듯 곱게 치장을 하구 아침저녁이면 안개가 깊을 때가 있어서 그 안개 속으로 보는 풍경은 한층 정서 있는 것, 공원에서는 밤마다 음악회가 열려서 동양에서는 첫째가는 관현악단이 고전의 교향악을 연주하면 시민들을 흠뻑 흡수해 들이군 해요. 하얼빈만 가면 구라파는 다 간 셈, 인정으로 풍속으로 음악으로 풍경으로 하나나 이국적인 정서를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사무원 자신의 환영의 재현이요, 꿈의 되풀이인 것이다. 다시 그 땅을 밟아 볼 길이 아득한 김에 미란들을 붙잡고 자기의 취미를 말하고 꿈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만족시키자는 것이다. 장황한 설명이 미란들의 편으로 하면 한없이 여정을 북돋아 주고 자극해 주는 셈이 되었다. 그의 어투는 설명이라느니 보다도 능란한 묘사여서 구절구절이 실감을 띠고 울려와서는 마음을 들까불게 해놓았다.
“웬만하면 게서 이 해를 날 작정입니다만.”
“좋구 말구요. 가을뿐이 아니라 겨울은 또 겨울로서 좋은 데죠. 눈 오는 거리 무더운 방안 다 각각 그 정취가 있거든요. 놀기두 좋구 공부하기두 좋구 각각 직책을 따라서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거든요. 난 세상에서 여행하시는 분 같이 행복스럽구 부러운 분은 없어요. 평생 동안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된 사람임은 말할 것두 없죠. 반생의 짧은 여행에서 절실히 느꼈어요. 지금은 이렇게 갇혀서 꼼짝달싹 못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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