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눈물의 여왕’, 전옥
제2대 ‘눈물의 여왕’, 전옥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5.11 13:23
  • 호수 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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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월회 연극 무대를 거쳐

영화에서 ‘비극의 여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음반도 발표

그의 재능은 후손으로 이어져

1950년대 휴전 직후 10세 미만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자주 다녔습니다. 이재필이라는 한국인이 세웠다는 만경관(萬頃館)도 갔었고, 일제때 조선관(朝鮮館)이란 이름으로 불렸다는 대구극장에도 갔었습니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습니다. 전쟁 직후의 고달픈 시절이 워낙 삶의 고통을 겪게 하였고, 아무런 희망이 없던 슬픔의 세월이라 무엇보다도 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워낙 고난과 역경의 과정이라 비극영화를 한편 관람하는 시간은 그때만큼이라도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어느 정도나마 덜어내는 유일한 카타르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비극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앞은 항상 인산인해로 넘쳐났습니다. ‘목포의 눈물’, ‘눈 나리는 밤’ ‘가는 봄 오는 봄’ 따위의 영화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타이틀로 기억됩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옥(全玉, 1911~1969)입니다.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이지요.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게 되자 부모는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도리어 부모님을 설득해서 오빠 전두옥(全斗玉)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극단 토월회(土月會)의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겨우 16세의 전옥은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일찍 발탁되어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배우 전덕례가 어느 날부터 오빠의 이름에서 가운데 글자를 뺀 ‘전옥’이란 이름을 예명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배우의 이미지를 더욱 여성스럽게 만들었고, 게다가 다소 촌티가 느껴지는 것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8년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를 겸하고 있었던 강홍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 전옥의 나이는 불과 17세였습니다.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일본이 식민지조선의 서울에 처음으로 건립한 경성방송국(JODK)에 나가 생방송으로 노래를 불렀고, 방송극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았음을 말해줍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池斗煥)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녀는 극중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슬픈 독백으로 갑자기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극단에서는 비극의 적임자로는 전옥뿐이라고 확신하며 모든 비극작품의 주역으로는 당연히 전옥을 등장시켰습니다. 워낙 비극배우 역을 잘 소화시켜서 그 무렵부터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港口)의 일야(一夜)’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노래 ‘처녀총각’은 무려 10만장이라는 엄청난 분량이 팔리는 인기곡이 되었습니다. 

1969년 10월 배우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腦血栓)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가 불과 58세였습니다. 시대비극을 다룬 영화에 출연하여 수많은 관객들을 울리고 그들의 가슴 속 막힌 구멍을 뚫어주던 비극배우 전옥. 그녀의 삶은 이렇게 장엄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부모의 피와 재능을 이어받아 또다시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자, 어디 한번 보십시오. 남쪽의 배우 강효실과 북쪽의 배우 강효선은 바로 전옥과 강홍식 사이에서 태어난 자매입니다. 불운하게도 자매는 분단 때문에 두 지역으로 갈라져서 살다가 결국 서로 얼굴도 못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네요.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우 강효실은 인기배우 최무룡과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는 아들 최민수가 태어나서 배우가문의 대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최민수는 강홍식, 전옥의 외손자입니다. 하지만 강효실은 남편 최무룡과 이혼합니다. 전옥의 외손자 최민수는 강주은과 결혼해서 아들 최유성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또 배우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4대째 영화배우 집안의 명성과 가문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일이 누가 일부러 시켜서 될 일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전옥의 가요창법은 듣는 이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슬픔을 다시 불러일으켜서 그것을 결코 과장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고 정리하여 심리적 안정감으로 다시 재조정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서 이젠 제1대 ‘눈물의 여왕’ 이경설은 물론이거니와, 제2대 ‘눈물의 여왕’으로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전설적인 대배우 전옥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배우 전옥은 식민지의 억압과 유린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상처와 고통에 신음하던 당시 민중들의 가슴을 비통한 울음으로 쓰다듬고 위로하며, 민중들의 슬픔에 선뜻 동참하여 함께 공감하고 격려해주던 곡비(哭婢)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던 것입니다. 이 점이 배우 전옥의 위대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세월이 많이 흘러갔지만 우리가 지난 시기 우리의 대중문화사를 다시 더듬어 공부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망각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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