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5.18 11:19
  • 호수 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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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달 박사, 불치병 아닌데도 안락사 택해 화제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은 일본 TV드라마 ‘오싱’의 극작가 하시다 스가코(93)는 안락사를 하려고 한다. 그녀는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가하지 않는 일본을 떠나 스위스로 건너가 안락사하겠다고 말해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됐다. 하시다는 “스위스에 갈 때 도우미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 도우미에게 ‘내가 죽으러 갈 때 70만엔을 갖고 따라와 주게’라고 부탁해놓았다. 내 유골을 가지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시다 스가코는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고 말하지만 과연 언제 죽을 지는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세상에 미련도 없으므로 언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지만 죽는 시기는 모른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시켜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기꺼이 죽겠다라고 말은 하지만 아직은 실행에 옮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죽는 것도 귀찮다고 해야 하나”라는 말도 했다. 

반면에 최근 안락사를 실천으로 옮겨 세상을 놀라게 한 이가 있다.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유명을 달리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104) 박사. 그는 모국에서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자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까지 힘들게 달려갔다. 지난 5월 10일 오후 12시 30분, 스위스 바젤의 라이프 사이클 클리닉. 구달 박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은은히 울리는 병실에서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다. 의사는 넴뷰탈(펜토바르비탈나트륨)과 신경안정제를 혼합한 정맥주사를 혈관에 꽂힌 튜브에 주입했다. 정맥주사의 밸브는 잠긴 상태였다. 구달박사는 스스로 밸브를 열어 주사액이 몸속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잠시 후 구달 박사는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스위스에선 매년 1400여건의 안락사가 일어나고 있는데 왜 하필 구달 박사의 죽음이 세계적인 뉴스로 화제가 된 걸까. 그건 불치병에 걸리지 않아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손으로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의 안락사 중 구달 박사 같은 사례가 더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구달 박사는 죽음을 앞두고 행한 기자회견에서 “최근 수년간 능력이 급격히 떨어져 간다. 난 더 이상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내일 삶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기쁘다”며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발로 병원을 찾아가 정맥주사를 맞은 것이다. 구달 박사가 자살을 하려 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84세였던 1998년 운전면허가 취소되면서였다. 구달 박사는 이때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약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도 말 했다. 구달 박사의 안락사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하는 대신 그의 안락사를 이해하고 그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심리 상태에 충분히 공감하고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며 동조했다.  

인간은 죽음을 생각한다. 과거의 삶이 영예롭던 그렇지 못하던, 나이와 재산이 적던 많던, 행복하던 하지 않던 간에 사람들은 때때로 죽고 싶어 한다. 노인들은 체력적, 생리적으로 죽음이 자기 곁에 가까이 온 것을 느낀다. 몸이 조금 아파도, 기분이 우울해도, 작은 일에 상처 받아도 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때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구달 박사나 하시다 스가코 같은 이들의 말과 행동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이 두 가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서다. 인간의 존엄과 품격을 갖춘 죽음이란 의미의 ‘웰다잉’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이 높아가는 배경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1533~1592)가 죽음과 관련해 한 다음의 말을 참고삼아 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 일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며, 삶에 대한 근심으로 죽음까지 망쳐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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