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신작 ‘버닝’ 미스터리로 풀어낸 ‘N포세대’의 무력감과 분노
이창동 감독 신작 ‘버닝’ 미스터리로 풀어낸 ‘N포세대’의 무력감과 분노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5.18 13:37
  • 호수 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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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분노를 미스터리하게 풀어낸 ‘버닝’은 올해 칸 영화제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진은 극중 주인공인 ‘종수’를 맡은 유아인.
청년들의 분노를 미스터리하게 풀어낸 ‘버닝’은 올해 칸 영화제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진은 극중 주인공인 ‘종수’를 맡은 유아인.

日 작가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 올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두 소꿉친구와 수상한 남자의 이야기… 관객 선택에 따라 결말 달라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소설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하루를 버티기 바쁜 청년 ‘종수’. 그에겐 방패막이가 돼줄 가족도 풍비박산난 지 오래됐다. 이런 종수에게 한줄기 빛처럼 이성 소꿉친구가 찾아온다. 그녀만 곁에 있어 준다면 험난한 현실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마저도 어렵다. 그녀가 자신과 비교되는 세련되고 부유한 남자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다만 그 남자는 수상했다. ‘기괴한’ 취미도 그렇고 마땅한 직업도 없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조급해진 종수와 달리 남자는 느긋하기만 하다. 불현 듯 종수는 남자의 기괴한 취미를 떠올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기 시작한다.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버닝’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베니스‧베를린 국제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 국제영화제의 단골손님으로 꼽히는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버닝’이 5월 17일 개봉했다. 어김없이 이번 작품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영화 전문 매체 ‘아이온시네마’에서 경쟁부문 초청작 중 최고 평점을 받으며 작품성도 인정 받았다. ‘베테랑’, ‘사도’ 등을 잇달아 성공시킨 젊은 배우 유아인과 미국드라마 ‘워킹데드’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스티븐 연의 출연도 기대를 모으게 하는 부분이다. 

폭력, 장애인, 종교, 치매 문제 등을 폭넓게 다뤄온 이창동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N포세대’(다양한 삶의 가치를 포기한 20·30세대 지칭)라 불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품은 소설가를 꿈꾸는 ‘종수’와 그의 소꿉친구이자 내레이터 모델인 ‘해미’,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남자 ‘벤’을 통해 청년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분노를 영화적으로 풀어냈다.  

도입부부터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허겁지겁 담배 한 대를 태운 종수(유아인 분)가 배달할 옷을 어깨에 잔뜩 이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핸드헬드’(거치대가 아닌 사람이 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는 방법)로 촬영했는데 화면이 거칠게 흔들리면서 보는 관객마저 심한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을 단 한 장면으로 효과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배달을 마치고 나오던 종수는 우연히 소꿉친구인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성인이 돼 다시 만난 해미는 종수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이런 그에게 해미는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종수에게 큰일이 생겼다. 소를 키우는 아버지가 축산 담당 공무원을 폭행해 구속된 것이다. 종수는 급하게 서울 생활을 접고 아버지가 하던 일을 대신하게 될 처지에 놓였지만 결국 해미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온 종수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암송아지 한 마리만 달랑 남은 집은 텅빈 것 같았다. 유일한 낙은 해미의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이지만 낯을 가리는 고양이는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오매불망 해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종수는 귀국을 알리는 해미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공항으로 달려간다.     

오랜만에 만난 해미는 뜻밖에도 낯선 남자 ‘벤’(스티븐 연 분)과 함께 나타난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났다는 남자는 자신과 달리 고급 외제차를 몰고 강남의 부유한 저택에서 살았다. 주변에 친구도 많고 어딜 가나 환영받는다. 종수는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뚜렷한 직업도 없는 벤이 부유하게 산다는 데서 의심을 품게 된다.

해미에 대한 사랑과 벤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이 커지던 어느 날 해미와 벤이 집으로 찾아오게 된다. 이때 해미와 벤은 각각 ‘우물’과 ‘비닐하우스’와 관련된 비밀스런 얘기를 종수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얼마 후 해미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진다. 다급해진 종수와 달리 벤은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종수는 벤을 쫓고 물 위에 핀 뿌연 안개 같은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사회‧환경적 요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이를 영화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그 과정이 수수께끼 같다. 관객마다 영화를 보면서 취하는 결정에 따라 다른 결론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번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 단편인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작품인데 일부 설정은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특히 하루키의 상징과도 같은 ‘우물’의 이미지 역시 차용하고 있다. 하루키의 작품 속 우물은 다양한 이미지를 갖는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과도 같은 공간이다. 

여기에 더해 ‘버닝’에서 우물은 관객들이 진실의 여부를 가리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조연들은 각자 ‘우물’에 관해 다르게 기억한다. 우물의 진실 여부에 따라 해미의 실종 역시 의미가 달라진다. 작품 속에는 이와 같은 선택지가 여럿 등장하고 어느 것을 고르냐에 따라서 관객 개개인이 느끼는 ‘충격적 결말’의 의미가 달라진다.

“문자와 달리 영화 매체는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그 이미지라는 것은 그저 빛줄기가 스크린에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한 것이지 않나.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그것을 관객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나름의 의미와 관념을 부여하면서….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미스터리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창동 감독은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오정미 작가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칸 수상 결과가 어찌 됐든 그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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