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도 과거는 남는다
사람은 가도 과거는 남는다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8.05.25 13:56
  • 호수 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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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장충단 공원~’

‘하늘에서 별을 따다~’

노랫소리 귓가에 들리는 듯한데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갔나

찔레꽃을 보며 생각한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그대에게 전해드려요…’로 시작되는 광고용 노래가 있었다. 

지금도 가끔 TV에서 그 노래가 나올 때마다 살며시 눈을 감고 꿈을 꾼다. 폭이 넓은 청바지에 빨간 면 티셔츠를 입고 가슴에는 ‘생물학개론‘ 책을 안고는 목련꽃 그늘아래를 또박또박 걷던 내 모습. 목에는 요즘 승무원들이 하는 작은 스카프를 했던가. 아니지. 스카프를 넓게 접어서 헤어밴드를 했었지.  

그때는 참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었다. 그 짧은 노래 한 소절이 기특하게도 이 많은 추억들을 내게 안긴다. 

영화 주제곡도 돈 한 푼 안들이고 ‘그때 그 시절’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사운드트랙 중 ‘A time for us’이란 음악 중간에는 남녀주인공이 뽀뽀를 하는 소리와 함께 대사가 나오면서 음악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게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 음악만 나오면 얼굴을 들지 못했던 사춘기 시절도 내게 있었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란 영화 주제곡을 들을 때면 중학교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대천 해수욕장에 갔었던 그때 장면들이 내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온다. 단발머리에 반바지를 입고는 까맣게 탄 얼굴로 바닷가 모래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그 동무들. ‘그 동무들 지금은 다들 무얼 하는지, 보고파라 보고파.’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는 지금 안개가 없다. 궂은비 내리는 건 종종 봤지만 복잡하게 들어 찬 건물들 때문에 안개 낄 조건이 안 되는 건지 그곳을 지날 때 안개를 보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배호 노래 ‘삼각지 로터리’의 그 로터리도 철거된 지 오래됐다.

누가 그랬던가. 눈으로 기억되는 영상보다 귀가 기억하는 소리가 우리 뇌에 더 오래 남는다고. 음식이름도 마찬가지다. 일제잔재청산이라는 명목 하에 ‘닥꽝, 벤또, 오뎅’이 ‘단무지, 도시락, 어묵’으로 바뀐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게을러빠진 내 뇌는 여전히 닥꽝은 닥꽝이고 벤또는 벤또이고 오뎅은 오뎅이다. 

‘소사아저씨가 학교 안에서 뱀을 잡아 죽인 후로 소풍가는 날마다 비가 온다는 전설 때문에, 비 올까봐 전날 밤을 홀딱 새우다시피한 바로 그 소풍가는 날. 꼭두새벽에 일어나신 엄마가 열심히 김밥을 만들어 사이다랑 삶은 달걀이랑 왕방울만한 알사탕과 함께 가방에 넣어주셨던 엄마가 만든 그 김밥 안에 들어가는 건 ‘닥꽝’이고, 학교 앞 분식집에 ‘세일러복’ 같이 생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앉아서 한 손엔 핸드폰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정체불명의 시뻘건 ‘튀김 떡볶이 버무리’를 라면이랑 먹을 때 함께 먹는 건 단무지다.

추운 겨울, 눈이 가득 쌓인 운동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조회를 하고 뛰어 들어온 교실. 열심히 조개탄을 넣어 뜨끈하게 덥혀놓은 부지런한 주번 덕분에 벌건 난로 위에 가득 쌓인 우리들의 점심밥은 벤또이고, 편의점인지 음식점인지 헷갈리게 냉장고에 그득하게 진열된 많은 종류의 간편 식사는 도시락이다.

퀴퀴한 생선내장 냄새가 솔솔 나는 종잇장처럼 얇고 누런 것이 꼬불꼬불 접힌 건 오뎅이고, 막대형의 통통한 것이 꼬챙이에 예쁘게 꽂혀있는 건 어묵이다.

그런데, 닥꽝 대신에는 단무지가, 벤토 대신 도시락이, 오뎅 대신에는 어묵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노래 속에 있던 그 때 그 사람들은 지금 다 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에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는 ‘책을 가슴에 안고 헤어밴드를 한 예쁜 새내기 대학생도, 발그레한 얼굴의 사춘기 소녀도, 까맣게 탄 단발머리 소녀들도’ 모두들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사람은 가도 과거는 남는가 보다. 

그나저나 봄이라고 앞마당에는 찔레꽃이 예쁘게도 피었다. ‘찔레꽃 붉게 물든 남쪽나라 내 고향’의 노랫말처럼 남쪽에는 붉은 찔레꽃이 더 많은가. 우리 집 찔레는 하얀 나비가 잔뜩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흰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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