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사랑
무궁화 사랑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6.08 13:30
  • 호수 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의, 절개 무뎌진 요즘 무궁화 꽃 의미 되새겨야

무궁화에 특별히 애착을 가진 지인들을 간혹 만난다. 그 가운데 이화여대 총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지낸 이배용 씨의 열정이 뜨겁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켠에 무궁화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무궁화 꽃의 아름다움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전 원장은 “우리가 무궁화 꽃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더 이상 무궁화를 보기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노인회 박종애 경기 광명시지회장의 무궁화 사랑도 이에 못지않다. 박 지회장은 행사장에서 가슴에 다는 코사지를 무궁화 꽃으로 통일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박 지회장은 코사지 제조업체와 함께 ‘무궁화 꽃 코사지’를 조화로 제작해 지회 행사에 반영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 지회장은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노인회 행사에서 코사지로 쓰면 품격과 애국심이 높아지는 효과를 얻을 것”이라며 “행사가 끝나는 순간 버리고 마는 코사지를 많은 비용을 들여 매번 새로 구입하는 것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조화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무궁화 꽃은 단 며칠 만에 단명하지만 나무 전체로 볼 때는 끊임없이 새로 피고 지기 때문에 무궁한 영화의 나무로 보았다. 무궁화는 7~10월까지 100일여 핀다. 작은 나무의 경우 하루 50여송이의 꽃이 핀다. 100일 동안 필 것을 가정하면 한해 2000~5000여송이의 꽃을 피우는 셈이다. 

무궁화의 흰꽃은 무구청정(無垢淸靖)을, 진홍빛의 화심은 태양처럼 붉고 뜨거운 마음을 나타낸다. 무궁화의 전설도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려 16대 예종왕 때 일이다. 예종은 아끼는 신하 세 명에게 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두 사람은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나머지 한 사람(구 참판)은 그러지 않았다. 결국 구 참판은 두 사람의 계략에 의해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궁에서 쫓겨났다.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부인도 종이 되고 아들딸들의 소식도 몰랐다. 그럼에도 구 참판은 임금을 원망하지 않고 개성 쪽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절만 했다. 

며칠째 음식을 먹지 않던 구 참판이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숨을 거두자 종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다음해 구 참판의 묘 앞에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바로 무궁화다. 임금을 사랑하던 마음이 빨갛게 달아 속은 빨간빛이 됐고 죄 없음을 알리기 위해 잎은 흰색, 보라색으로 피어났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난 강희안은 ‘화목구품’(花木九品)에서 무궁화를 9품에 넣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하사하여 꽂는 어사화와 신하들이 꽂은 진찬화가 무궁화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나라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은 조국의 발전과 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이 있는 대통령과 외국 원수에게 수여한다.  

무궁화가 국화가 되기까지 논란이 많았다.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무궁화를 모조리 뽑아 불태우기까지 했다. 1907년 윤치호가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를 넣었고, 안창호가 국수(國粹) 운동을 일으킬 때 무궁화를 국화로 주장하면서 우리나라 국화가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정부수립 후 국가의 국기봉이 무궁화가 됐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황성신문’은 무궁화는 국화로 마땅치 않다며 복숭아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때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국화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세월의 흐름에 묻혔다.  

무궁화가 이 땅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철이 다가왔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무궁화 심기 운동을 전개해 요즘은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됐다. 품종 연구도 활발해 200여종이나 된다. 신의와 절개가 무뎌진 이 시대에 무궁화 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