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6.15 11:39
  • 호수 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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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식사하고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했다. 피난민의 아들이라서 그런가. 70년 가까운 세월, 적대적으로 지내온 북·미 두 나라가 한반도 비핵화와 양국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자고 다짐하는 장면들이 놀랍기만 하고 한편으론 연극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기자의 모친(89세)은 평양 제4여중 출신으로 ‘김면옥’(평양 신리)이란 냉면집 딸이었다.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사다 재봉틀에 앉아 원피스를 만들어 입을 정도로 정정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60대 아들보다 빠르게 걷는다. 이 상태로 라면 100세를 넘길 것이 분명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났던 4·27 판문점 회담 직후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친의 울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이어 “내가 홀몸으로 1·4 후퇴 때 피난 와서 숱한 고생을 하며 너희들을 키우느라…”라고 말했다. “감격했다, 여한이 없다”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팔자타령부터 했다. 수없이 들었던 얘기라 대략 수습하고 전화를 끊었다.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남북의 이산가족이 꿈속에서처럼 만나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당시 북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모친을 대신해 상봉신청서를 작성했다. 모친이 건네준 이면지에는 북의 주소와 부모·형제의 이름과 나이 등이 가득했다. 당첨의 행운은 오지 않았다.

최근 언론에 남북 이산가족상봉 얘기가 다시 거론됐다. 모친에게 ‘신청하지 않느냐’고 묻자 “안한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허탕 칠 것이 빤한데 같은 수고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는, 60년 넘은 시간의 간극이 혈육을 찾으려는 본능을 무디게 했을 수도 있다.
기자는 간혹 ‘이북이 고향이냐’는 말을 듣는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60여년을 살며 표준말을 쓰지만 억양에 이북사투리가 스며있는가 보다. 이북말을 생생하게 쓰는 모친 밑에서 컸으니 당연할 터다. 기자는 젊었을 적 친북·동포애적인 감정을 가졌다. 모친으로부터 “이북이 남한보다 잘 살았어. 여기 와서 보니 멸치로 국물을 우려내는데 비려서 못 먹겠더라. 북에서는 쇠고기 국물을 우려낸다”는 말을 들을 땐 은근히 우월감도 들었다.

그랬던 감정이 분노와 적대감으로 바뀐 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문이다. 1976년 8월, 미군들이 공동경비구역에서 시야를 막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던 중 북한군의 난데없는 습격을 받아 비명횡사한 사건이다. 당시 북한군이 도주하는 미군을 쫓아가 도끼로 내리치는 장면이 TV에 그대로 방영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은 용서할 수 없는 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북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원망과 저주를 갖게 된 건 김현희의 KAL기 폭파 사건이다. 수백 명의 남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 민간 항공기를 한순간에 한줌의 재로 날려버리는 잔악한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6·12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을 두고 외신들과 보수언론은 잔뜩 불만을 늘어놓았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국가 원수가 아니라 부동산 거래를 하는 영업사원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김정은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와 북한 정권의 범죄 행위에 대한 어떤 변화도 약속하지 않았다”고 했다. 북한에 농락당했다는 표현도 나왔다.
국내 보수언론은 “북미정상회담의 합의문에 CVID란 핵 폐기 원칙이 명확히 담겨져 있지 않다. 대신 트럼프는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했다. 결국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꼴만 됐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비관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를 만난 자리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듯 “우리에겐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도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는 김 위원장의 말을 믿고 기다려 볼 일이다. 피난민의 아들이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핵보유국이 아닌 이상 그가 전 세계를 향해 약속한 말을 믿을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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