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실에서는 기미를 알아채었는지 화다닥들 튀어나가는 눈치였다
목욕실에서는 기미를 알아채었는지 화다닥들 튀어나가는 눈치였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6.15 11:40
  • 호수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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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89]

그러나 그렇게 알뜰히도 싸 오고 받들어 오던 세란에게서 그의 마음이 떠난 지는 오래였고 순간의 전율에서 깨어날 때 세란들에게 대한 분은 새로 솟아나면서 순간의 본능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백 번 생각해도 미운 것들이다. 불측한 것들이다――불길이 가슴속에 솟으면서 현마 앞에서 던진 한마디는 정직하고도 무서운 한 마디였다.
“얼른 들어가 목욕실을 보시지. 아예 대경실색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시진 말구.”
옥녀의 태도에 현마도 뜨끔하면서 모든 것을 직각했던 것도 싶다. 아니 그 한마디를 들을 날을 무의식중에 기대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최후의 한 마디의 뙤임이 필요했던 것이지 아무리 심드렁하다고는 해도 집안사람들의 기맥을 그렇게까지 모르고 지내 왔을 리는 만무하다. 낯빛이 변하면서도 엄연한 그의 태도 속에 그런 의미가 스스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왜 이리 설레는 거야.”
속에 끓는 불덩어리를 싸 가지고도 자약한 말솜씨다.
“집안 꼴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보시면 설레는 이치를 아시겠죠.”
“잔소리 말구 내 앞을 물러서라니깐.”
고함은 쳐도 옥녀 보기에는 그의 전신은 부들부들 떨리고 걸음걸이도 허전허전한 것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는 것이며 문을 힘껏 드르렁 여는 것이며 들가방을 홱 내던지는 것이며가 보통 때의 거동은 아니요, 그 속에 무서운 분노의 흐름을 감춘 것이었다. 옥녀는 한편 시원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몸을 움츠리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금시 쏟아질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궁 앞에 납신 웅크리고 앉았다. 눈앞이 핑핑 돌면서 세상이 뒤집히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화기와 함께 전신을 달게 한다.
현마의 수선스런 거동에 목욕실에서는 기미를 알아채었는지 숨을 죽인 듯이 말소리들이 그치고 잠잠하더니 밀창이 열리면서 차례차례로 화다닥들 튀어나가는 눈치였다. 지저귀던 새들이 포수를 만나자 무뜩 그치면서 수풀 속으로 숨어 버리는 셈이었다. 목욕실 문은 활짝 열어젖힌 채 감감해진 대신 포수의 총소리가 집안을 울리고야 말았다. 옷들이나 갈아입었는지 어쨌는지 혼란한 옥녀의 귀에 현마의 고함이 들린 것은 그런 여유도 없을 바로 그 즉석인 듯했다. 우레가 좀해 쉬지 않듯 현마의 고함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어도 세란과 단주의 목소리는 쥐 죽은 듯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옥녀는 몸이 숭숭거리는 판에 순간순간이 견디기 어렵다. 침침한 부엌에 박혀 있기가 더욱 괴로워서 일이고 무어고 집어치우고 뜰로 뛰어나가 현관 앞에 살며시 앉아 버렸다. 일이 그렇게 된 이상 자기에게도 누가 미쳐 올 것은 사실이요, 이제는 될 대로 되고 올대로 오라는 배짱으로 집안의 기맥을 엿듣게 되었다.
“고얀 것들! 짜장 기르던 개에게 다리를 물리었구나.”
현마는 그 육중한 몸으로 그렇게 번민해 본 적은 없었다. 장대한 육체에 고민이 올 때 표정이나 거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앓는 황소같이 꿍꿍거릴 뿐이요, 무표정하기 짝이 없다. 단주가 옷을 대충 걸치고 안방에서 대청으로 어슬어슬――그에게도 또한 그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나――들어올 때 현마의 격동한 목소리는 농으로나 들릴 정도로 되려 희극적인 어투를 띤 것이었다.
“고얀 것들! 짜장 기르던 개에게…….”
“개 개 하니 얼마나 길러 주었게 사람을 그렇게 천하게 본단 말요 원.”
가만히 있어도 좋았을 것을 단주는 잠잠한 것이 멋쩍은 김에 말대꾸를 시작한 것이다.
“도적질을 하다 들켜 두 발명(發明)을 한다더니 뻔질뻔질한 말버릇 봐라.”
현마는 얼굴을 물들이고 펄쩍 뛴다는 것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함을 친다. 고함만은 표정과 달라서 고래 같은 대성에 단주는 뜨끔해지면서 놀라면 또 무엇이든지 주워대야지 그대로 못 있는 성미였다. 몸은 떨면서 목소리만이 간들간들 살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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