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과 서금영
한국 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과 서금영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6.22 14:52
  • 호수 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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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생각’ 부른 이정숙은

또랑또랑한 울림으로 다가와

‘달마중’ 부른 서금영은

나직하고 은은한 음색이 매력

옛 동요는 여전히 심금 울려

동요(童謠)는 어린이의 생각과 표현을 담아서 만든 가사와 노래의 조화로운 혼합적 구조물입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깨끗하고 순진무구한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탈로 말미암은 시련과 고통에 허덕일 때에 당시 아동문학가들은 숱한 동요를 만들어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 이름도 고결한 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을 비롯하여, 홍난파, 윤극영, 정순철, 윤복진, 박태준, 윤석중 등 당대 최고의 아동문학가 및 작곡가들이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보급과 확장에 노력했던 일들은 이제 아득한 신화처럼 여겨집니다. 봉건시대에는 어린이란 말조차 없었지요. 그저 개똥이, 돼지, 강아지, 두꺼비 따위의 동물명으로 부르고 인권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아동들에게 어린이란 이름을 최초로 만들어 불러주며, 그들의 존재를 하늘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당시 선각자들의 거룩했던 꿈과 포부를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동요는 192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1926년 9월에 발표된 홍재유의 동요음반 ‘할미꼿’ ‘춤추세’가 첫 음반으로 보입니다. 그로부터 1939년 5월까지 약 13년 동안 약 230여종이 넘는 동요음반이 10개의 음반회사에서 제작발매가 되었습니다. 동요라는 부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왕성하게 음반을 발매했던 회사는 단연 리갈레코드사였습니다. 취입동요 음반들을 가수별로 집계를 해보면 누가 가장 최고의 동요가수였었던가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다취입 가수는 단연코 50여곡 이상을 음반에 취입한 이정숙(李貞淑)입니다. 그녀는 피아노연주 2곡과 작사 1편까지 포함해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한국근대 최고 동요가수였습니다. 이정숙이 활동했던 음반사로는 주된 터전이었던 콜럼비아, 리갈사를 비롯하여 닙본노홍, 이글, 리갈레코드사 등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정숙은 한국 근대동요사에서 동요음악을 유성기음반으로 취입하여 전국적인 동요보급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정숙의 대표곡 ‘오빠생각’ 1절)

한국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금강키네마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던 유명 영화감독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이었지요.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徐錦榮, 1910∼1934)입니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전당포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의 설정식과 윤석중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라서 예측대로 명망 높은 시인이 되었습니다. ‘장래의 음악가’에는 동덕여자보통학교 재학생 서금영이 선발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수재아동의 가정을 소개할 때 ‘창가 잘 하는 아가씨’로 서금영에 대한 취재기사가 실렸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이정숙이 다녔던 중앙보육학교로 진학했는데 재학시절 이미 이름난 동요가수로 여러 무대에 올랐습니다. 1931년 중앙보육학교 졸업생 명단에 서금영의 이름이 보입니다. 서금영도 이정숙과 마찬가지로 홍난파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창법지도를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1931년 1월 ‘바닷가에서’, ‘무명초’ 등이 취입된 첫 음반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뒤 1934년 6월 '해바래기', '봉사꼿'까지 내리닫이로 10여곡 이상을 취입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콜럼비아를 주무대로 하면서 리갈, 이글, 닙본노홍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초빙을 받아 다양한 음반들을 발표했지만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당시 서금영의 나이는 불과 23세였습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서금영의 대표곡 ‘달마중’ 1절)

우리들의 어린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숙과 서금영을 비롯한 옛 동요가수들의 노래는 한 세기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두 사람의 음색과 창법을 비교해보면 이정숙은 서금영에 비해 한층 낭랑하고 또랑또랑한 울림으로 펼쳐집니다. 가련함과 애처로운 느낌이 듬뿍 풍겨나는 애수의 정서가 서금영에 비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이에 대조적으로 서금영의 음색과 창법은 나직하고 은은함이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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