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그날 이후
이게
생이려니 했다
김인애(시인)
-디카시집 ‘당신에게 얼마나 가 닿았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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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둥치만 남은 채 형체조차 없어져버린 나무의 흔적. ‘그날 이후’가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하던 날이었을까.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베어져버린 그날이었을까. 수십, 아니 수백 년을 푸르게 물들었을 모든 날들을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몸으로 받아들이기가 쉬웠을까. 나무도 가지가 잘리면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매일 ‘너는 아름다워, 너는 정말 멋져’라고 말해주면 보다 더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과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런 나무가 ‘그 날 이후 이게 생이려니 했다’니. 절망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모든 걸 다 체념해 버린 듯한 저 한 마디 말이 비수가 되어 나에게 박힌다. 너무나 아리고 안쓰럽고 먹먹하다.
이 디카시는 디카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 3행의 시적 문장만으로는 도저히 어떤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과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완벽한 한 편의 디카시가 되어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디카시다. 글=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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