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마가 내젓는 붓끝에서 떨어지는 숫자는 삼천 원이었다
현마가 내젓는 붓끝에서 떨어지는 숫자는 삼천 원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7.06 11:33
  • 호수 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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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92]

“무서운 집안――일찍이 나오기를 잘했지. 그 꼴들을 보았더라면 맘이 얼마나 뒤집혔을까.”
“나두 그중의 한 사람이구 그런 풍습을 꾸며 논 것이 나였던지두 모르긴 하나 생각할수록 몸서리나는 집이긴 해. 담쟁이와 초목 속에 숨어서 온통 푸른 속에서 무엇이 있는지를 까딱 모르구 왔단 말야. 얼마나 오래 끌었는지 결국 그다지 길게두 안가 판이 드러나구 결말이 오는 것을.”
“집을 벗어 나온 후부터 난 이렇게 맘이 거뿐해졌어요. 지옥을 벗어나온들 이다지야 개운하겠어요. 사람에겐 불행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결국 잊어버리는 수밖엔 없는데 언제까지나 울구불구만 있을 수두 없는 일, 모든 것을 씻어 버리구 난 지금 아침 해를 보는 사람이에요.”
원망하는 법도 없고 한하는 법도 없이 침착하게 재생의 소식을 전해주는 미란의 마음씨를 현마는 고맙게 받으면서 그 맑은 정신의 교류 가운데에서는 지난 허물은 기억 속에 떠오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길을 찬동하고 축복해 주는 생각으로 가슴속은 차졌다.
“암 미란에게는 영훈과의 그 길이 가장 옳구 바른 것은 물론 내야 부러워하구 탐내야 하는 수 없구 다만 멀리서 바라보고 빌어줄 뿐이지만――꼭 한마디 말할 자격이 있다면 평생 가야 난 맘속에서 미란을 잊을 수 없다는 것, 미란의 맘과 아무 관계없이 내 이 맘만은 첨부터 생긴 것이구 어느 때까지나 변할 리 없는 것――괜히 쓸데없이 장황하게 말할 것두 없는 것이나…….”
미란이 맞장구만 친다면 현마의 회포와 하소연은 끝날 틈이 없었을는지 모른다. 미란의 심경으로도 아무리 길게 그것을 듣는 대도 무방한 것이기는 하나 목적이 있어 온 그는 알맞은 곳에서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마음을 작정했던 이상 스스러울 것도 없고 부당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아서 말을 내기가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세란이 어찌 됐든지 간에 난 세란의 동생임이 틀림없고 지금 말하는 것두 그 동생의 자격으로서 하는 것인데 아시다시피 이번 여행을 떠나게는 됐으나 내 부담까지를 영훈에게 씌울 수두 없구 해서 생각하던 차에.”
“좋구 말구. 솔직하게 말을 해준 것부터가 내게는 기쁜 일인데 요행 내게는 힘두 있구 힘자라는 데까지야.”
미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뜻을 요량하고 앞서서 언하(言下)에 말을 주는 것이다.
“――세란의 동생이라는 뜻을 떠나구 지난날의 지저분한 기억과두 떠나서 참으로 맘속으로 난 그것을 원하는 터에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무엇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 처지에 서지 않으면 아마도 모를 걸. 내게는 재산이 있기는 하나 영화니 무어니 이런 노름에밖엔 쓸길두 없는 것이구 그까짓 하치않은 재산이 다 무어게.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것이라두 희생하구 싶은 맘인데 잘 말해 주었소.”
그 자리로 서랍을 열더니 소절수장(小切手帳)을 집어냈다. 가진 사람으로서의 자랑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숨은 발톱을 감춘 것도 아닌 단순하게 보이는 거동이었다.
“예금 관계로 우선 이것만을 적으나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또 쓰구 말구.”
내젓는 붓끝에서 떨어지는 숫자는 삼천 원이었다. 담담한 태도에 미란은 넋을 잃은 사람같이 흥미도 감격도 느끼지는 않고 숫자라는 것이 참으로 쓰기 수월한 것이로구나 삼천이라는 숫자가 대체 그렇게도 헐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흡사 남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같이 힘도 맥도 안 들고 신비도 자극도 없는 일순간이었다.
“돈이 원래 더러운 것이긴 하나 아예 더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구 맘속에 엉겼던 것 다 풀어만 버린다면 그 돈을 쓰기가 그다지 괴롭진 않을 것이요. 길바닥에서나 얻어 본 듯 아예 맘 쓰지 말구 헐하게 없애시오. 영훈에게 말하기 거북하거던 저금했던 것을 찾았다구 해두 좋을 것이구 앞으로도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일러만 주면 더 도와줄 작정이오. 외국에 가서 곯는 것 같이 섭섭한 때는 없을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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